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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2]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사혈환(蛇血丸)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2]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사혈환(蛇血丸)

입력 2015-11-02 15:10
업데이트 2016-06-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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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에 관한 인식은 동서양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종교적인 영향 탓에 서양에서는 뱀을 사악한 존재로 여겼지만, 우리는 모양이 징그럽다면서도 영물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구렁이가 죽지 않고 살면 이무기가 되고, 그 이무기가 1000년을 더 살면 종국에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믿었던 것도 그렇고, 집에 사는 구렁이를 집지키미라고 여겨 아예 한 지붕 밑에서 데리고 살기까지 했으니 말이지요.
 이와는 좀 다른 축의 얘기지만, 여항에서는 뱀을 중요한 보양강장제로 여겨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족보 깨나 가졌을 법한 귀한 뱀은 술에 담가 사주(蛇酒)를 만들어 약 삼아 마셨고, 그렇고 그런 뱀들은 약탕건에 넣고 과서 노약자들 보신용으로 먹기도 했으니까요.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한 텔레비젼의 탐방 프로를 보다 보니, 아직도 뱀을 구워먹는 습속을 가진 밀림 속 부족이 있긴 있더군요. 구운 뱀은 맛이 아주 좋은 별미라면서요.
 
 ●여항의 명약이었던 ‘사혈환(蛇血丸)’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추석이 지나 들일도 거진 끝물에 들고 더러는 서리가 앉을 때이니 아마 10월도 하순 쯤이었을 것입니다.
 집에서 농삿일을 돕는 ‘송상’(송씨 아저씨는 일제 때 강제징용으로 일본 어디론가 끌려가 노역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한 탓에 그렇게 불렸다) 아저씨가 들일을 마친 뒤 등줄기가 거무튀튀한 뱀 한마리를 손에 거머쥐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게 아닙니까. 대가리를 거머쥐었지만 뱀은 여전히 살아있어 손등을 친친 감은 채 용을 쓰고 있었습니다. 길이가 짧고, 대가리가 당차게 생긴 게 시골에서 까치독사(살모사)라 부르는 그 뱀이 틀림없습니다.
 부엌일을 하시다 그 광경을 보신 어머니는 당장 내다 버리라고 호들갑이었지만, 아버지 생각은 달랐습니다. 한 눈에 독사를 알아보시고는 쾌재라도 부를 듯 뱀을 받아들더니 손으로 몸통을 쭈욱 훑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순간, 용을 쓰던 뱀이 축 늘어지자 대가리를 실로 묶어 기둥에 매단 뒤 목함 성냥곽에 밀가루를 깔아 받치고는 가위로 꼬리를 톡 잘라내더군요.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는 피를 아주 특별하게 여겼습니다. 손가락을 물어뜯어 나온 피를 혼절한 사람의 입에 흘려 넣어 회생시키는 설화나 민담 속의 장면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의를 다지기 위해 피를 나눠마신 사이를 혈맹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최근 드라마로 제작된 김주영 작가의 ‘객주’(장사의 神)에서도 보부상들이 피를 나눠마시며 맹약을 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이런 전통이 비단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유럽 등지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피를 특별하게 신성시했지요. 아마 이런 습속이 낳은 민간요법이 바로 뱀의 피를 환(丸)으로 굳혀 보혈강장제로 사용했던 배경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효과는 제쳐 두고라도 치명적인 기생충 감염 등의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시절에야 그런 것까지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너나 없이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린 탓에 요새는 너무 과해서 문제가 되는 지방이나 단백질 결핍으로 피골이 상접해 휘청거리던 때였으니, 어디 뱀만 탐했겠습니까. 개구리나 메뚜기, 조막만 한 참새는 물론 심지어는 시궁쥐까지도 죄다 약이 되고, 먹거리가 되는 세상이었지요.
 고운 밀가루 위에 똑똑 방울져 떨어진 뱀의 피는 그대로 말려 환약으로 만들었는데, 몇 알 되지도 않는 이게 또 요긴한 구급약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아이를 낳은 산모의 젖이 모자라기 일쑤였습니다. 연년생으로 줄줄이 낳기도 많이 낳았던 데다 산모가 뭘 좀 잘 먹어야 젖이라도 풍풍 나올텐데 먹는 게 워낙 부실해 가난한 사람들이야 ‘부잣집 개 먹듯 주리고’ 살았던 세상이니 빠는대로 젖이 나올 턱이 없지요. 그러니 아이들 얼굴이 온통 외꽃이라도 핀 듯 노랗게 떠서 어질어질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식은 땀 흘리며 늘어진 아이에게 그 사혈환을 두, 세알 먹이면 금새 혈색이 살아나곤 했습니다.
 그게 정말 그 사혈환의 효험인지, 시들시들한 애 얼굴을 보고 놀란 애엄마가 제삿때나 쓸 요량으로 광 속에 꼭꼭 감춰둔 쌀을 한 줌 덜어내 고와 만든 흰죽의 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기력을 찾은 애를 보며 사람들이 그랬지요.“정말 비얌 피가 좋긴 좋네. 저거 다시 살아난 걸 보니.”
 
 

●과학은 가능성에 주목하는 모험
 그렇게 독사의 피를 환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우리의 민간요법은 사실, 뱀의 생태를 생각할 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현대의 약리성으로 따져봐도 사람의 피를 구성하는 성분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게 만든 환약 한, 두알 먹었다고 뭐가 그리 달라질까 싶은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때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믿음으로 그걸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항온성인 사람과 달리 변온성인 뱀의 피가 당장 헐벗고, 주린 사람에게서 어떤 약리성을 보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분명한 점은 그렇게 만든 사혈환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고, 그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혈환의 효험을 믿었다는 것이지요.
 기생충학이나 독성학이 보편적인 의학 교육의 교과목으로 자리 잡은 지금이야 그런 민간요법이 감염이나 중독의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효능에 대한 과학적 검증도 없으니 당연히 사술(詐術)이나 사이비(似而非)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만 해도 얼마나 기생충이 들끓었냐 하면, 나무젓가락 같은 회충이 뱃속에서 시쳇말로 ‘지랄발광’을 해대기 시작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횟배앓이로 데굴데굴 뒹굴며 식음땀을 쏟아야 했고, 똥을 눠보면 하얀 촌충이 꼼지락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요. 잘 먹고 산 것도 아닌데 이런 기생충에게 진기를 다 뺏기고 살았으니 아이들이 금방 밥 먹고 돌아서면 배 고프다고 투정이었고, 그렇게 껄떡거려도 항상 시진해 비틀거렸습니다.
 어디 피 챙기는 게 뱀 뿐이었겠습니까. 지금도 건강원 같은 곳에서는 사슴피가 여전히 암암리에 공급되고 있고, 돼지 피로 만드는 순대는 없어서 못 먹는 토속 먹거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 각인된 음식이 아니라면 지금이야 그런 비방이나 요법이 필요한 세상은 아니지요. 먹거리며 각종 산물이 차고 넘쳐 끼니마다 이것 저것 골라서 먹는 세상, 좋은 약 많고, 좋은 의사도 많은데 그런 일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런 내림을 무조건 청산해야 할 야만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오래된 지혜의 단절이라는 점 때문에도 그렇고, 혹 그 안에 감춰져 있을 의학 혹은 과학적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기 보다 도대체 뱀 피로 만든 사혈환의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명쾌하게 짚어보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문명의 대응축인 야만은 극복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모든 것을 야만시하고, 금기시하는 건 또다른 야만일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민간요법은 전통 의학의 모태
 오랫동안 민간에 전래되어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도 알 수 없고, 누가 무슨 효험을 봤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민간요법은 들여다볼수록 기이하고 재미있습니다. 서양의 의학교육을 받았거나 한의학이라도 최근에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텍스트에도 없고, 치료 효과나 안전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는 민간요법을 달갑게 여길 리 만무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이유만으로 무작정 민간요법을 사갈시하는 건 우리가 체득하고 축적해 온 지혜를 깡그리 짓밟는 것만 같아 아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 까치독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동의보감에 뱀은 성질이 차고, 맛이 쓰며, 독성을 가졌는데, 구충과 익창(부스럼)에 효험이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만, 그건 당시만 해도 체계가 잡힌 제도권의 시각일 뿐이지요. 민간의 쓰임은 그런 이론적 근거를 중요시한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아무도 정확한 약리적 특성을 몰랐고, ‘어디에, 어떻게 쓰니 좋더라’는 체험의 구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까치독사를 사람들은 무서워 했습니다. 물리면 십중팔구는 죽었으니까요. 예전에는 까치독사에게 물리면 ‘하늘이 세번 울어야 낫는다’고도 했고, 한번 물리면 일곱 걸음을 떼놓기 전에 절명한다는 뜻으로 칠보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걸 보면 그 뱀독이 치명적으로 인체의 신경계에 작용한다는 점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까치독사를 어떤 곳에서는 살모사라고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칠점사, 칠점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게 같은 종의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종인 지는 필자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맹독을 가진 뱀을 술이든, 탕 또는 환이든 섭생의 용도로 활용하는 민간요법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맹독을 먹고, 마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 역시 검증된 논리로 조목조목 이의를 제기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함부로 섭취하면 어떤 성분이 간독성을 부른다거나 아니면 무슨 무슨 성분 때문에 치명적인 중독에 빠질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렇지 않고 그런 방식은 위험하다고 두루뭉수리하게 하는 말로 뼛속 깊이 새겨진 민간요법의 개연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까지 말끔히 씻어내기는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인삼이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삼이야 요즘에는 과학적 성분 분석이나 약리성이 잘 검증돼 성분이나 효능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귀한 산삼을 대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재배한 이 삼이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값이 만만찮아 없는 사람은 죽음이 목전에 와도 그거 한 뿌리 먹어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 인삼 매장 없는 곳이 없고, 길거리 좌판에서도 잘 생긴 곡삼, 수삼을 헐값에 파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삼은 중요한 한약재이기도 했지만, 민간요법에도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약재였습니다. 이런 인삼의 효능과 용처는 오랜 세월, 다양한 체험으로 축적한 것이어서 동양의학은 물론 서양의학에서도 주목하는 초본류임에 틀림이 없고, 그래서 민간요법이라면 모로 돌아앉는 사람도 말을 바꿔 인삼이라고 하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민간요법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비록 심층적인 연구도 없고, 검증된 보고도 없지만 그보다 더 값진 체험이 용해돼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넣을 것 넣고, 뺄 것 빼서 완성됐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단편적이나마 민간의학을 기록해 둔다는 것은 의학적 가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도 유용하고,문화적 정체성을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jesh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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