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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왜 나는 그 서점의 단골이 되었는가/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왜 나는 그 서점의 단골이 되었는가/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입력 2017-02-01 18:34
업데이트 2017-02-0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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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내 인생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는 언제였던가. 아마도 고등학생 무렵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학능력시험으로 입시가 바뀌면서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지침이 언론에 보도되고 난 이후부터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이외의 책 읽기를 권했지만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였다. 혼란을 틈타서 나는 좋아하는 소설을 잔뜩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들여다봐야 입시에 도움이 될 리 없겠다 싶어도 ‘어쨌거나 지식은 지식이니까’라는 마음가짐으로 책을 샀다. 물론 엄마한테 돈을 타내면서 양심의 가책은 느꼈지만.

우리 집 근처 대능극장 삼거리에는 조그만 책방이 있었다. ‘삼거리 서점’이라고 다들 불렀다. 동네마다 심심치 않게 서점이 눈에 띄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필요한 책을 사러 간다’가 아니라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른다’는 여유로운 입장이었기 때문에 굳이 단골 서점 같은 걸 만들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삼거리 서점에서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늘 카운터를 지켰는데 묘하게 쌀쌀맞아서 살가운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가 이 서점의 단골이 되었을까.

중간고사 준비로 친구들이 분주한 와중에 나만 한가롭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능극장 맞은편 건물에 있는 독서실에서 ‘장길산’ 5권을 읽는데 포도대장 최형기가 한참 끗발을 날리던 시점에 페이지가 끝나 버렸다. 당장 6권을 읽지 못하면 시험에 대한 공포로 질식할 것 같았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공부하기는 싫지만 덮어 놓고 놀자니 불안할 때는 소설을 읽는 게 최고다.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현암사판 장길산 6권의 정가는 3900원이었다. 삼거리 서점으로 뛰어간 나는 지갑에서 4000원을 꺼내 주인아저씨에게 건넸다. 거스름돈으로 ‘뽑기’나 한판 할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아저씨가 대뜸 200원을 거슬러 주는 거다. “어, 100원을 더 주셨는데요?” 했더니 이 양반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보면서 “7권 사러 또 올 거잖아”란다. 다정한 목소리로 “또 오너라”가 아니라 상당히 무뚝뚝한 어조의 “또 올 거잖아”였다. 그 말이 묘하게 가슴을 쳤다. 뭔가 존중받은 기분이었다.

그 뒤로 7권을 살 때도 8권을 살 때도 아저씨는 항상 100원을 더 거슬러 주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마일리지 개념이었겠다. 주인아저씨가 되돌려준 100원이 고작해야 얼마 되지도 않을 마진을 고려하면 얼마나 큰 금액인가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일리지로 인해 내가 계속해서 삼거리 서점을 찾은 건 분명하다. 어찌 보면 작은 배려지만 ‘그 서점’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기에 나는 두말없이 단골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구시가에 위치한 서점 메이어체에 들렀을 때 나는 25년 전의 기억을 문득 떠올렸다.

이 서점의 1층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몸이 자랄 대로 자란 나는 한쪽 길로밖에 가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며 층계참에 서서 아동 코너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것은 테마파크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법한 대형 미끄럼틀이었다. 흡사 ‘호그와트’나 ‘나니아’로 안내해 줄 통로처럼도 보였다. 그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수많은 아이들 중 누군가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지금의 나처럼 추억을 되새기며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책방에 마법의 통로 같은 길이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그렇다면 제군! 내가 중간에 포기한 프루스트의 소설은 훗날 그대가 꼭 정복해 주길. 다소 어렵긴 하지만.
2017-02-0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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