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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빚, 알바, 취업절벽…“나에게 20대는 없었다”

[외환위기 20년] 빚, 알바, 취업절벽…“나에게 20대는 없었다”

강경민 기자
입력 2017-11-19 10:33
업데이트 2017-11-1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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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실직’에 일찍부터 밥벌이 고민…빚갚느라 학비버느라 닥치는 대로 ‘알바’“내 자식은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 살았으면”

민문식(37)씨에게 1998년의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부산의 두 평 남짓한 슬레이트 지붕 가건물에서 민씨 부모는 자녀와 숙식을 해결하며 분식집을 운영했다. 매일 찬바람에 튼 손으로 김밥과 떡볶이를 준비했지만, 돈은 좀처럼 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빚 갚느라 힘들다. 이제 네 앞길은 네가 챙겨야겠다”며 단돈 30만원과 함께 민씨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엄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의 표정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씨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민씨 아버지의 신발공장은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연전연승’했다. 갯바위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낚시용 장화를 개발해 일본 굴지의 레저용품 회사와 납품계약을 맺기도 했다. 민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왕자’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놀기 좋아하던 고교생 민씨에게 어머니가 “공부 잘하면 차 사줄게”라고 말할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은 외환위기와 함께 땅밑까지 추락했다.

그해 초가을, 옆 공장에서 난 불이 아버지 회사 공장과 창고로 옮겨붙었다. 아버지는 급히 거액의 빚을 내 공장을 다시 차려 물건을 만들었다. 민씨도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거들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본격화되면서 갯바위 낚시화는 창고에 쌓여만 갔다. 당시 대기업까지 거꾸러뜨렸던 ‘부도 바람’은 아버지 회사도 휩쓸어버렸다.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았다. 지인의 도움으로 분식집을 차렸지만, 이자 갚느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홀로서기에 나선 민씨는 부산 사상구의 한 고깃집에 들어가 일명 ‘불맨’ 알바를 했다. 매일 고깃집에서 먹고 자며, 점심부터 밤늦게까지 시뻘건 숯불을 피우던 그는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민씨는 2001년 제주의 한 전문대 사진과에 입학했다. 장비를 사고 학비와 생활비를 내느라 고깃집 알바로 모은 돈은 한 학기 만에 바닥났다.

밤 9시까지 사진관에서 알바를 뛰고, 이어 자정 너머까지 단란주점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에서 백숙을 끓여 팔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는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민씨는 결국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졸업 후 곧바로 군에 입대한 민씨는 목돈을 만지려고 자이툰 부대에 지원해 6개월간 이라크에서 파병 생활도 했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로 진 1천500만원의 빚은 제대했을 때쯤 2천여만원으로 불어있었고, 그에게는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주변에 빚을 대신 갚아줄 사람이 없었던 민씨가 군대에 있는 동안은 채무가 유예될 것이라 믿고서 상환에 신경 쓰지 않은 탓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사무용품 판매점에 어렵게 취업한 민씨는 2011년이 돼서야 대출금을 다 갚았다. 청년기의 절반인 10년을 빚 갚는 데 쓴 셈이다.

민씨처럼 외환위기 시절 청년기를 보낸 세대는 일찍부터 빚에 허덕이거나 밥벌이를 고민하며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1970년대 초중반생들은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절벽’에 서야 했다. 10대에 아버지의 실직을 경험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생들은 캠퍼스의 낭만을 포기하고 학점경쟁에 나섰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비를 벌었다는 ‘무용담’은 이들 세대에 매우 흔하다.

회사원 곽모(38)씨도 당시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 2학년 휴학을 하고서 아르바이트에 나섰던 때를 기억했다. 얼어붙은 경기 때문에 과외 자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음식점과 일용 건설직, 당구장, 놀이동산 등 돈이 되면 닥치는 대로 했다.

고3 때 외환위기로 아버지 사업이 휘청거렸다는 곽씨는 “당시를 생각하면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이 여기저기 수소문하시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들 세대에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탓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먼저 자리 잡았다.

민씨는 지난해 말 수천만원 대출을 받아 송파구 법조타운에 사무용품점을 열었다. 예전처럼 빚을 지기는 했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빚을 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며, 늘 허덕이며 살았던 내 청춘을 자식들만큼은 똑같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모험을 하게 됐다”면서 “내 아이들은 나보다 더 여유롭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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