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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의 세상 속 수학] 우주정거장과 확률

[박형주의 세상 속 수학] 우주정거장과 확률

입력 2018-03-27 17:54
업데이트 2018-03-28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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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우주정거장 톈궁 1호의 지구 추락이 임박했다고 한다. 9t 가까운 거대한 구조물이 떨어지는 것인 데다 4월 1일 전후로 추정되는 추락 가능 지점에 우리나라도 포함돼 있어서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경쟁적으로 위성을 쏘아 올리기만 했던 것에 비교하면 앞으로는 국제 논의를 통한 위성 운용 계획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박형주 아주대 총장
위성 추락의 위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엉뚱하게 확률 얘기가 자주 대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얼마나 위험한지 미리 가늠해 보려는 탓일 텐데, 톈궁 1호가 우리나라에 추락할 확률을 단순 계산해 보면 3600분의1쯤 된다. 추락 가능 범위의 면적과 우리나라 면적을 단순 비교한 수치다. 추락하는 우주 물체의 파편에 사람이 맞을 확률은 1조분의1쯤 되는데, 사람이 벼락에 맞을 확률이 140만분의1인 걸 감안하면 엄청 낮은 가능성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실생활 곳곳에서 출몰하는 확률 개념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피할 도리도 없다. 스마트폰에는 비 올 가능성이나 습도가 확률로 표시돼 있고, 예상 온도는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기댓값이지 않은가. 각종 질병 검사도 병에 걸릴 확률의 추정에 가깝다.

누군가가 내일 해가 뜰 거라고 귀띔해 준다면 이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다. 그간의 경험으로 내일 해가 뜰 가능성이 1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즉 확률이 높으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작다. 반대로 내일 UFO가 나타날 거라고 귀띔해 준다면 일어날 확률이 0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아주 희귀하고 중요한 정보가 된다. 이렇게 정보의 가치도 확률과 반비례로 연결돼 있다.

확률 개념의 시작은 17세기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과 법학자이면서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페르마가 서신 교환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비범한 두 사람이 서신을 통해 깊이 연구했던 문제는 ‘점수의 문제’라는 일종의 도박에 관한 문제였다. 회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루카 파치올리가 처음 제시했던 문제인데, 150년간의 논쟁 끝에 파스칼과 페르마가 짜릿하게 해결했다.

영희와 철수가 만원씩을 내고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동전 앞면이 나오면 영희가 1점을, 뒷면이 나오면 철수가 1점을 얻는다. 총 7점을 먼저 획득하면 판돈 2만원을 다 가지고 가는 게임이다. 운이 좋다면 내리 7번을 이기고 2만원을 쉽게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경쟁하면서 영희가 5점을 얻었고 철수가 3점을 얻었는데, 귀가할 시간이 돼서 게임을 중단하게 되면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2만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회계학의 대가인 파치올리는 현재까지 얻은 점수대로 5대3의 비율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공정한 것 같다고? 그랬다면 150년의 논쟁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파스칼과 페르마는 서신 교환을 통해서 확률과 기댓값의 개념에 다다랐다. 그들의 돌파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자는, 즉 ‘현 상태에서 중단 없이 게임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였다. 영희가 이길 확률은 16분의13이고 철수가 이길 확률은 16분의3이 된다. 판돈을 이 비율대로 분배하면 1만 6250원과 3750원이 되는 데, 이게 기댓값의 개념이다. 혹시 연필과 종이가 옆에 있다면 한번 이 계산을 해 보시라. 보험 상품 설계나 바둑의 수 결정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에서 유사한 확률 문제가 등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18-03-2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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