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더위 심하니 일 중단합시다”… 협력사가 스스로 안전 챙겼다

“더위 심하니 일 중단합시다”… 협력사가 스스로 안전 챙겼다

백민경 기자
백민경 기자
입력 2018-07-23 18:02
업데이트 2018-07-23 18:06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SK석유화학’ 작업중지 첫 발동 르포

대기업이 ‘을’ 근로자 안전 제도적 보장
16개 협력사 근로자 300명 반나절 휴식
“안전·보건·환경 먼저” 경영 노력 결실
3944억 적자 3년 만에 3966억 흑자로
이미지 확대
인천 서구의 SK인천석유화학 내 작업장(아로마틱 공정)에서 일하던 협력사 직원들이 폭염으로 첫 작업중지권이 발동된 지난 20일 작업 현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인천 서구의 SK인천석유화학 내 작업장(아로마틱 공정)에서 일하던 협력사 직원들이 폭염으로 첫 작업중지권이 발동된 지난 20일 작업 현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전국이 ‘가마솥더위’로 푹푹 찐 지난 20일 오후. 하루 27만 5000배럴의 원유를 정제해 석유류 제품을 생산하는 인천 서구의 SK인천석유화학 내 작업장(아로마틱 공정) 온도가 42도를 넘었다. 외부 온도가 33도에 달해서다. 휘발유, 경유 등 원유 분류 가공 작업을 하는 곳이다 보니 통상 외부보다 작업장 온도가 20~30%씩 더 높다.

SK 협력사로 10여년째 일한 김진욱 국제산공 소장이 오후 1시쯤 작업장에 들어섰다. 그는 큰 목소리로 “오늘 불볕더위가 심하니 작업 중지하시고 4시까지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합시다”라고 수십명의 근로자에게 외쳤다.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로도 같은 내용을 알렸다.

대기업 하도급 작업을 맡은 협력사 직원 스스로 ‘작업중지권’을 발동한 첫날이다. ‘작업중지권’이란 작업 환경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근로자 판단 아래 즉각 작업을 그만둘 수 있는 권한이다. 올해 정부가 28년 만에 입법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에 이 내용이 포함됐으나 산업 현장에서 실제 활용되는 일은 사실 전무하다. 이를 제도적으로 명문화하기 위해 SK인천석유화학은 지난달 말 5개 협력사와 함께 ‘작업중지 권한 이행 서약식’을 갖기도 했다.

근로자들이 5시 30분에 퇴근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SK인천석유화학 작업 현장에서 일하던 16개 협력사 300명의 근로자는 사실상 이날 반나절 작업을 접은 셈이다. 날씨나 위험도에 상관없이 일했던 현장 근로자들은 다소 멋쩍어하면서도 웃음을 띠고 에어컨과 음료수, 샤워 시설이 갖춰진 정비동 휴게실로 이동했다. 그간 인건비 때문에 안전시설이 부실해도 목숨 걸고 작업해야 했던 ‘을’(乙) 입장의 협력사에선 그동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30년간 파이프 수리·보온 업무를 맡았던 국제산공 박병순 작업반장은 “그간 파이프 작업 발판(비계)이 허술해도 공사 시간에 쫓기다 보니 안전벨트나 고리도 없이 일했던 날이 다반사였다”면서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된 요즘 대기업이 협력사에 문서화, 제도화를 통해 협력사가 직접 안전을 요구하고 행사할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공장을 나와 협력사 식당으로 이동하니 문 옆에 무재해 연속 기간 ‘20일’을 알리는 기록판이 설치돼 있었다. 이 기간이 150일, 300일, 600일을 넘기면 포상금을 준다. SK인천석유화학은 전 공정에 ‘밀폐배수시스템’도 도입했다. 김양훈 SK인천석유화학 설비관리팀장은 “정기보수 기간 때 장비를 닦으면 악취를 동반한 폐수가 나오는데 이를 막는 배수정화 시스템을 갖춰 협력사가 쾌적하게 작업할 수 있게 했다”면서 “작업중지권을 독려하고자 이를 요청한 직원은 개선 제안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간주해 포상 대상으로도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SK의 ‘임금공유’도 같은 맥락이다. SK그룹은 본사 구성원들이 매달 기본급의 1%를 기부하면 회사 역시 같은 금액을 내 ‘1% 행복 나눔’ 기금을 마련한다. 이 돈을 협력사 직원 복지 등에 쓴다. 협력사 직원 1인당 매년 70만원 정도가 돌아간다. 이 같은 SK의 ‘SHE(안전·보건·환경) FIRST’ 경영 노력은 수치로도 나타났다. SK인천석유화학의 영업이익은 2014년 -3944억원에서 지난해 3966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SK그룹은 “협력회사 직원들은 업무와 소속만 다를 뿐 같은 곳에서 땀 흘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협력사와의 동반 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면서 “안전·환경 분야에서 협력사와 함께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가겠다는 최태원 SK 회장의 포부”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2018-07-24 21면

많이 본 뉴스

의료공백 해법, 지금 선택은?
심각한 의료공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와 정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유예하고 대화한다
정부가 전공의 처벌 절차부터 중단한다
의료계가 사직을 유예하고 대화에 나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