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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이색, 여말선초 학계·문학계 ‘태두’… 조선 문학 태동시킨 문인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이색, 여말선초 학계·문학계 ‘태두’… 조선 문학 태동시킨 문인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18-07-30 17:40
업데이트 2018-07-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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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색 ‘목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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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의 초상. 경남 하동군 청암몰길 25 금남사에 있다. 1404년 제작한 것을 영조 42년(1766년)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는 목은을 찬양한 글을 써놨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233호로 지정됐다. 출처 하동향토문화백과
목은 이색의 초상. 경남 하동군 청암몰길 25 금남사에 있다. 1404년 제작한 것을 영조 42년(1766년)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는 목은을 찬양한 글을 써놨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233호로 지정됐다. 출처 하동향토문화백과
“내 학맥이 해외로 전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

규재 선생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건만

근래 들어 다른 물건은 값이 모두 뛰어도

내 글만은 제값 한번 받지 못하누나.

-‘목은집’ 시고 13권, ‘일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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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선생의 묘.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충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이색 선생의 묘.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충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세상을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물가는 예외 없이 뛰고 있는데 심혈을 쏟아 쓴 내 글 값은 오르기는커녕 제값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군가? 원나라의 큰 학자 규재 구양현(1283~1357) 선생도 인정한 인재 아닌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들 생계에는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세상이 답답하다.

#고려말의 국제인

자신의 학맥이 고려 사람 목은에게 전해질 거라던 구양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목은이 세계 제국을 이룬 원나라의 서울에 가서 당당하게 인재들과 겨루어 과거에 급제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원나라에 유학해 성공한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발군의 인물이었다. 원나라에서 위축되지 않고 패기 있게 경쟁한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시화에 전해 온다. 구양현이 자신을 찾아온 목은을 얕잡아 보고 다음과 같이 조롱 섞인 말을 던졌다.

“짐승 발굽과 새 발자국이 중국 땅을 마구 밟는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목은은 이렇게 대꾸했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사방에 뻗치는군!”

제법이라 여긴 구양현이 다음 시를 불렀다.

“술잔을 들고 바다에 들어갔으니 바닷물이 많은 줄 알렸다!”

목은이 지지 않고 바로 짝을 맞췄다.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선 하늘이 작다고 말하는군!”

구양현은 목은을 오랑캐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했다. ‘중국을 보니 놀랍지’라며 비웃었다. 목은은 바로 ‘개소리 말라’며 인물을 볼 줄 모르는 속 좁은 놈이라 되받아쳤다. 무시하다 되레 당한 구양현이 “그대는 천하의 기이한 재사”라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일화에는 뻣뻣하고 오만한 중국 학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목은의 패기와 재치가 생생하다. 그러나 목은이 원나라에서 겪은 좌절과 고민을 떠올리면 이 일화는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목은은 고려와 원나라에서 최고 지식인 반열에 결코 쉽게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숱한 좌절과 각고의 노력이 그 바탕에 깔렸다.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해 큰 인물이 된 목은에게 후대 사람이 건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일 뿐이다.

#고려말 지성계의 정점

목은은 현재 충남 서천군에 속한 ‘한산’이란 작은 고을 출신이었다. 문벌 귀족 출신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아버지 가정 이곡과 함께 학문으로 고려와 원나라, 두 나라에서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목은 부자는 당시 실력으로 무장한 신흥 유학자 세력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공민왕 시대에 성균관을 개편해 시스템을 바꾸려 하였는데, 목은이 그 책임을 져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을 주관해 ‘유학의 종장’이란 위상을 확고히 거머쥐었다. 그의 위상이 실로 대단해 여말선초 많은 인재, 예컨대 삼봉 정도전, 도은 이숭인을 포함한 대다수 지식인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학계와 문학계에서 ‘태산북두’(泰山北斗, 중국 제일 명산인 태산과 북두칠성을 일컫는 말. 그 분야의 최고란 뜻)였다.

한편, 목은은 신흥 유학자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으나 나중에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개혁파와 노선을 달리했다. 조선 개국에는 부정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벌귀족의 정치에 반대하다 고려의 멸망을 앞두고는 보수적 색채를 드러냈다.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 변화의 중심에 서서 괴로워하고 고뇌하는 과정은 고스란히 그의 수많은 시에 나타났다. 그의 시를 추동하는 힘은 혼란한 사회를 헤치고 가는 지식인의 자아였다. 50대 초에 지은 ‘스스로 읊다’ 전반부에서 목은은 당시 사회를 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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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읊다’
‘스스로 읊다’
인물이 분주하게 같은 길을 함께 가며

부질없이 집안 내세워 문벌을 다투누나.

시서를 읽었다고 다 군자 되지 않나니

정승들도 예로부터 평민에서 나왔다네.

문벌 귀족들이 세력을 다투며 집안을 내세웠다. 향촌 출신 목은은 집안이 아니라 실력을 내세웠다. 집안 좋다고 다 잘나지 않고, 공부 많이 했다고 다 군자가 아니다. 개인을 말해야 하고, 실력으로 승부를 겨뤄야 하는데 당시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그의 시는 당시의 이런 사회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조선시대 한문학의 개창자

목은이 학문계의 태두인 것은 분명하나 정치적 역량이나 권력에서는 아무래도 한발 물러나 있었다. 활동의 중심은 문학이었다. 정도전이나 정몽주와 같은 인물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그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였다. 깊은 인상을 남길 만한 단행본 저작이 없어서 일반 독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산문가였다.

생존 시 학문과 문학에서 맞상대가 거의 없었던 위치는 그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국제적 명성을 지닌 작가로서 글을 많이 쓰고, 또 쉽게 썼다. 목은은 쓰면 곧 글이 되는 작가였고, 어떤 소재든 글로 쓰는 작가였다. 그렇다 보니 때로는 정제되지 않거나 거친 작품도 없지 않았다. 목은의 시는 마치 그의 일기와도 같아서 삶에서 일어난 사건과 생각의 과정을 곧잘 드러낸다. 이런 점이 조선 사대부 문학의 갈 길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시대 문학을 태동시킨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목은의 시도 훌륭하지만, 그의 산문은 한층 훌륭하다. 많은 작품 중에서 35세 때 쓴 ‘유사정기’(流沙亭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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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정기’(流沙亭記)
‘유사정기’(流沙亭記)
천하를 겉으로 보면, 동쪽 끝으로는 해가 뜨는 부상(扶桑)에 닿고, 서쪽 끝으로는 곤륜산에 닿으며, 북쪽은 초목이 나지 않고, 남쪽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 이런 지역까지도 성인의 교화가 적시고 뒤덮고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때는 늘 적었고 분열된 때는 항상 많았다. 이야말로 내가 마음속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을 안으로부터 살펴보면, 힘줄과 뼈로 묶여 있고 성정이 약하게 작용하는 중에 마음이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우주를 감싸고 있고, 현상과 사물을 접하여 대응하고 있다. 위세와 무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간교한 꾀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바로 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천하의 한쪽 끝 치우친 곳에 처박혀 가만히 엎드려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다고 해도, 그의 흉금과 도량은 성인의 교화가 미치는 천하 사방 아무리 먼 곳이라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35세 때 외가가 있는 영해에서 동해를 내려다보며 언젠가는 기필코 천하의 중심에 서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젊은 목은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친다. 이 혼란한 세계의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으나, 천하 사방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우주를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있는 인간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세계의 중심에 서라고 권유하는 목은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국제인으로 살고 싶어 했던 거장의 흉금이 엿보인다.

목은은 종종 글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투덜대며 지식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시와 문장은 글의 내용과 문체의 특징, 그리고 유학을 토대로 한 사상적 경향 등 여러 면에서 조선 500년 문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후배 문인이 배워야 할 모델이 됐다. 게다가 그의 후손은 뛰어난 문인을 많이 배출한 명가로 유명하니, 목은은 글 값보다 더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 하겠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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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집 표지 이미지.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목은집 표지 이미지.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 ‘목은집’은

1626년 중간 58권 29책… 詩 4262수 방대

시고 35권, 문고 20권에 목록 3권을 합해 모두 58권 29책이다. 태종 4년(1404년)에 편찬돼 간행됐다. 인조 4년(1626년)에 중간됐다. 시는 4262수, 산문은 232편이 수록됐다. 작품량으로 따지면 그보다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가 전후에 없을 정도다.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수준에서도 그를 능가할 만한 작가가 많지 않다. 고려 말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자료로서 가치 있다.
2018-07-31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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