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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 기자
이기철 기자
입력 2018-08-21 10:30
업데이트 2018-08-2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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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수난사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말하는 ‘문화재’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16일 덕수궁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포격 당할 위기에 처했던 덕수궁이 포격 대상에서 제외된 과정 등 덕수궁과 얽힌 우리 문화재 수난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16일 덕수궁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포격 당할 위기에 처했던 덕수궁이 포격 대상에서 제외된 과정 등 덕수궁과 얽힌 우리 문화재 수난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의 과거사를 정리하다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골동품상 이희섭(李禧燮)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에서 조선대공예전람회를 7차례 엽니다. 전람회 한 번에 우리 문화재 1500점에서 3000점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전시하고 모조리 팔아치웁니다. 이희섭은 도록을 7권 만들었지요. 도록에 실린 문화재 일부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7차례 전람회에 진열된 문화재가 1만 4516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희섭은 서울에 ‘문명상회’라는 본점을 두고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해 우리 문화재를 상설 전시해 팔아먹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으로 팔려나간 문화재가 최소 3만점에서 5만점에 이를 겁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인데요, 한 개인이나 상인이 그렇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조씨 문중, 가전 서적 700여권 일본에 스스로 갖다바쳐”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30년째 연구해 정리하는 정규홍(62)씨는 광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이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갖다바친 것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어느 조씨 가문에서는 일본 도쿄대박물관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서적 700여권을 아주 싼 값에 넘겼다는 기사가 고고학 잡지에 나옵니다.” 어느 문중이냐고 묻자 정씨는 “기사에서 그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한자로 조나라 조(趙)가 적혀 있더라.”고 소개했다.
이완용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제갑주(古制甲冑, 옛 갑옷과 투구)를 기증했다는 1909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 기사
이완용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제갑주(古制甲冑, 옛 갑옷과 투구)를 기증했다는 1909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 기사
정규홍씨는 1981년 교직 연수를 받으면서 석굴암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담한 취급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문화재 수난일지와 우리문화재 수난사, 유랑의 문화재 등을 펴낸 수난 문화재 전문가다. 문화재 수난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중학교 교사직도 그만뒀다. 그동안 정부나 관계당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경북지역 문화재 수난사를 쓰면서 용역 의뢰받은 것이 당국의 지원 전부였다.

- ‘돈 안 되는’ 우리 문화재 역경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이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희열감도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랄까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잠자면서도 술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들고, 꼬투리가 잡히면 잊으려해도 그게 안돼요. 강단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때문에 중도에 끊기는데, 난 그런 것도 없기에 이것 하나만 파고 들어갑니다.

●“문화재 수난사 정리 이유?···중독성에 희열감이죠”
일본 야마토분카칸이 소장한 청자구룡형정병.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청자구룡형정병은“전라남도 강진군의 분묘에서 승반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야마토분카칸 소장품 도판목록에 적혀 있다. 정규홍씨 제공.
일본 야마토분카칸이 소장한 청자구룡형정병.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청자구룡형정병은“전라남도 강진군의 분묘에서 승반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야마토분카칸 소장품 도판목록에 적혀 있다. 정규홍씨 제공.
- 많이 힘들겠다.
☞ 돈 안되는 일을 하니깐 무엇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교직에 있을 때 월급받아 상당액을 이것 연구에 쏟아부었으니깐. 지방에 한번씩 현지 조사 다니면 교통비에 숙박비도 만만찮죠. 책도 사고,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도 엄청 합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때 복사비가 한장에 3원이었는데 이젠 50원으로 16배가 됐어요. 문화재 수난사에 관한 책을 냈는데, 잘 팔리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책 몇 권 주고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니 시간은 잘 갑니다.

- 그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 이번에 ‘요것만 정리하고 손 떼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런데 한 건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기에서 또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다보면 숙제처럼 이만치 쌓입니다. 그러니깐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미국 공사관이 한국의 갑주를 구매한다는 황성신문 1901년 1월 12일자 광고.
미국 공사관이 한국의 갑주를 구매한다는 황성신문 1901년 1월 12일자 광고.
- 수난 문화재가 그동안 왜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됐나.
☞ 1945년 해방 직후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정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고적조사와 유적연구 등에 한국인의 근접을 못하게 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했거든. 해방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이 떠나고 나니깐 총독부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남은 고적조사, 발굴보고서 등의 정리를 전혀 못한 채 박물관에 쳐박혀 있었던거지요.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물 목록과 실물과의 대조가 정확하게 안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력 부족 탓이지만 국가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빨리 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일제시대 한국인 유적연구 차단···유몰 목록과 사료 대조 못 해”
이토 야사부로(伊藤彌三郞)가 1910년에 발간한 『고려소(高麗燒)』에 게재된 사진. 이 책자는 송도를 중심으로 10리 내외와 강화도 고려 귀인의 묘에서 정교한 청자가 많이 나온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규홍씨 제공
이토 야사부로(伊藤彌三郞)가 1910년에 발간한 『고려소(高麗燒)』에 게재된 사진. 이 책자는 송도를 중심으로 10리 내외와 강화도 고려 귀인의 묘에서 정교한 청자가 많이 나온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규홍씨 제공
- 문화재 수난 분야, 처음 연구는 어떻게 했나.
☞ 처음엔 마땅한 자료가 없으니 헌책방을 많이 기웃거렸죠. 1981년 이후 헌책방에 다니면서 문화재 관련 책을 사모았죠.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축쇄본을 돋보기로 보면서 자료를 모았죠. 또 일본인이 남긴 조사자료와 잡지 이런 것을 위주로 연관지어 보죠. 연관성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거죠. 예컨대 발굴사업 보고서가 나오면 이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옵니다. 기사와 고적조사 보고서가 약간 차이가 날 경우가 있거든요. 무덤 발굴의 경우 일본인들이 1차적으로 유물명을 기록하고 바로 박물관에 수장시키지 않고 1년간은 걔네들이 연구를 해요. 그 기간 유물이 분실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분실이나 망실 그런 문헌이나 문서가 나와 있어요. 이를 비교해서 불법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 당시 일본이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혈안이 됐나.
☞ 일본의 각 대학이 잔치를 벌이듯이 우리문화재를 진열해 놓고 경쟁적으로 전람회도 가졌지요. 낙랑 유물부터 그때까지. 도쿄대 공과대와 문과대가 별도로 진열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람회 도록이나 기록들이 감춘 게 없이 매우 정확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통치할 줄 알았던 게지. 식민지 정착을 위한 하나의 사료로 삼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수집해 가져갔지. 그때 조선에는 1908년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뿐이었거든. 1915년 12월에서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생기면서 법으로 유물 반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얼마든지 일본으로 가져갔지. 이런 단체로는 조선고적연구회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일본 도굴꾼들이 대거 몰려들어 우리나라 무덤을 다 파헤쳤죠. 1908년 이전에 고려 무덤의 경우 거의 다 파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수시로 어느 무덤이 파괴되고, 어떤 무덤은 4~5회에 걸쳐 도굴됐지요. 심지어 대낮에 총칼을 갖다놓고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도굴하고···.

●“고려 무덤 마구 도굴···日대학들, 우리 문화재 진열 경쟁도”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청자연당초문정병. 1909년 일본에서 열린 고려소전람회에 출품된 작품.네즈 미술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청자연당초문정병. 1909년 일본에서 열린 고려소전람회에 출품된 작품.네즈 미술관 소장
- 해방이 되면서 문화재 수난이 줄었나.
☞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합니다. 그리고 9월20일 미군 300명이 부산항에 들어오지요.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 군인의 무장해제와 퇴출이예요. 미군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에 눈치빠른 일본인들이 문화재를 잔득 가지고 일본으로 나갔던 거죠. 미군이 10월 말쯤부터 일본 민간인을 퇴출시키죠. 그때 귀국 일본인에게 돈 1000원과 작은 옷보따리 정도만 허용하고 귀중품은 모두 압수했든거죠. 그러니깐 일본인들은 어선같은 것을 빌려서 밀항을 합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공주에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이들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가져간 것이지요. 이들에 빌붙어 밀한을 도운 게 한국사림이예요.
맹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맹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미군에 의한 문화재 유출도 있었나.
☞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귀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세화인회(世話人會)’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일본인들의 물품 같은 것을 맡아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맡은거지요. 당시 서울역에서 화물을 부산으로 보내면 중간인 대전역에서 미군이 화물을 압수해 물자영단(物資營團)에 넘겨버리는 것이지. 그 물자영단 창고를 미군이 관리했는데, ‘우리 문화재나 귀중품은 박물관에 넘기고 나머지는 P.X에 넘긴다’고 말하지만 미군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처분해버린 경우도 많았죠. 해방전후 골동계에서 유명한 이영섭이 부산에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물자영단에 있는 그림 1000점 이상을 싼 값에 샀지. 그가 샀던 그림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가 없어. 또 한때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맹호도’ 출처는 흥미롭지. 1946년 한 미군이 골동품 상인 두명을 일본인 창고로 데려갔지요. 골동품 상인들에게 감정을 요청해 감정해 주니 미군이 그 댓가로 주었던 게 맹호도이지요. 나중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사들였지만 미군에 의해 흩어진 문화재도 부지기수예요.

●“미군정기와 6·25 전쟁서 문화재 수난도 어머어마”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일분 수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는 수항루의 1900년대 사진. 1907년 박문관에서 발행한 사진화보 제2권 제10편에‘한국인이 크게 자랑하는 장소’라는 설명과 함께 게재돼 있다. 수항루는 1908년 1월 이전에 일본에 의해 철거됐다. 정규홍씨 제공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일분 수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는 수항루의 1900년대 사진. 1907년 박문관에서 발행한 사진화보 제2권 제10편에‘한국인이 크게 자랑하는 장소’라는 설명과 함께 게재돼 있다. 수항루는 1908년 1월 이전에 일본에 의해 철거됐다. 정규홍씨 제공
- 6·25 한국전쟁 때도 문화재가 많이 파괴·유출되었다.
☞ 6·25 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파괴됐지.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파괴가 가장 심했지요. 유엔군이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펼쳤던거죠. 소개령이 떨어지니 사찰에선 중요 유물들을 갖고 나옵니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가보면 절은 없어지고 재만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유물들이 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것이죠. 전국을 돌아다녀보면 오래된 절인데 건물만 새로 짓고, 유물이 없는 사찰이 많아요. 또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는 극히 일부인데, 이마저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이 불타버렸지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는 미군들이 찾아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종묘에 있는 옥새와 금보(金寶·선왕이나 선비에게 올리는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 이런 것이 상당히 분실됐지요. 1952년 신문을 보면 미군들이 옥새와 금보를 금은방에 가져와 감정해달라고 하다가 다른 미군에 의해 검거되는 그런 기사가 몇건 나옵니다.

- 그 이후엔 문화재 수난이 더 없었나.
☞ 1960~70년대에는 왠 도굴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본인 밑에 따라다니면서 도굴을 배운 기술자들이 그렇게 많이 도굴을 해요. 일재 잔재지요. 심지어는 집 짓는다하고 장막을 두르고 밤에 도굴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유물은 1970년대엔 이삿짐으로 위장해 미국에 갖다나르다 적발된 경우가 많지요. 유물을 모조품처럼 가장해서 밀수출하다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밀수전문가들과 한국의 중간 브로커들하고 짜고 가져간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많지요.
1905년에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 아베 소스케(阿部惣助) 거실 모습(中央情報鮮滿支社編, 『大京城寫眞帖』1937).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들은 온갖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면 무덤에서 파낸 도자기나 고대 서화 몇 점씩은 사모아 실내를 장식했다. 그의 뒤편으로 우수한 고려자기가 보인다. 정규홍씨 제공
1905년에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 아베 소스케(阿部惣助) 거실 모습(中央情報鮮滿支社編, 『大京城寫眞帖』1937).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들은 온갖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면 무덤에서 파낸 도자기나 고대 서화 몇 점씩은 사모아 실내를 장식했다. 그의 뒤편으로 우수한 고려자기가 보인다. 정규홍씨 제공
- 지금까지 수난당한 문화재는 몇 점이 되나.
☞ 1981년부터 올 4월까지 조사해 파악한 국외유출 문화재는 17만 2300여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관공서·도서관·박물관 등 공식기록을 비교 조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한 것으로 낙랑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유물입니다. 제 조사는 관공서 위주여서 개인소장은 거의 포함돼 있지 않거든요. 오구라가 반출한 문화재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인 1100여점만 도쿄박물관에 기증됐고, 나머지 수천점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소장한 것을 포함하면 100만점이 해외에 떠돌고 있지 않겠느냐고 추산합니다.

●“파악된 수난 문화재 17만 2300여점···실제론 100만점 넘을듯”
일본 도쿄에 있었던 야마나카 상회의 1930년대 야외 전시장 모습. 조선에서 반출된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정규홍씨 제공
일본 도쿄에 있었던 야마나카 상회의 1930년대 야외 전시장 모습. 조선에서 반출된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정규홍씨 제공
- 국외 유출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어떻게.
☞ 현재 파악된 17만 2300여점은 물론이고 앞으로 소재가 확인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차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굴해 소장했느냐는 경로 파악을 위해 고적 조사자료, 잡지에 실린 논문, 신문기사 한 줄까지도 축적해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불법성 드러날 것입니다. 불법성이 드러난 것은 환수 운동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협정 때의 ‘청구권 포기 규정’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 환수 부분은 민간단체가 적극 나서야지요.

정씨는 “문화재는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혼이자 공동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것 즉, 함부로 관리하고 방치한 것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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