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窓] 조화는 행복한 세상의 시작이다/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생명의 窓] 조화는 행복한 세상의 시작이다/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입력 2011-09-10 00:00
수정 2011-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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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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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가을 들녘을 거닌다. 황금빛 물결이다. 바다를 앞에 둔 남해의 들녘은 그 푸른 바다와 마주 서 황금빛이 더욱 선명하다. 황금빛 벼들은 고개 숙여 하늘을 향해 인사하고 바다와 바람과 농부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해 인사한다. 조화롭게 자신을 완성한 존재들의 마지막 언어가 감사라는 것을 나는 황금빛 들녘에서 배운다. 가을 들녘은 조화로 아름답다. 가을 들녘은 ‘모든 것은 서로를 의지해 존재한다.’는 생명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어 보인다. 가을 들녘에 서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가 되어 순하게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기 때문이다.

가을 들길을 거닐며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추어 본다. 가을 들녘에 비친 우리들의 세상은 아름답지가 않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화보다는 분쟁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조화를 이루어야 할 종교마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게 된 형국이 되고야 말았다.

얼마 전 조계종은 ‘종교 간 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초안을 발표했다. 큰 기조는 종교 간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생명의 평화와 안락을 실현해 가자는 것이다. 초안은, 다름은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남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연기적 세계관이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이라고 초안은 말하고 있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다름’이 있다. 이것은 존재의 다름이기도 하고 진리관의 다름이기도 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평화는 다름을 인정한 조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나’, ‘내 것’을 주장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기적 세계관을 등지고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는 다름을 언제나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무지의 언덕을 힘써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안은 말하고 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름은 인정하면 조화가 되지만 부정하면 분쟁이 되고야 만다. 다름을 다름으로 수용하는 것은 연기적 지혜이고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탐욕적 무지이다. 종교는 온전한 지혜의 구현이 아니던가. 달라이라마는 종교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떤 종교든 다 수용할 수 있다는 자비를 보인 것이다. 이 자비는 지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지혜가 없는 자비가 없고 자비가 없는 지혜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황금빛 들녘을 여름내 오가며 나는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았고 바람과 햇살이 어떻게 이 들녘을 지나는가를 보았다. 지금의 이 벼들은 하늘과 바람과 햇살과 비와 농부의 조화와 헌신의 결과이다. 모든 것들이 자신을 거름처럼 묻어두고 사라진 자리에서 벼들은 황금빛 물결로 익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벼는 단순한 벼가 아니고 일체의 모든 것이 된다. 모든 것의 조화가 빚어낸 가을 들녘의 황금빛 물결은 그래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종교 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조화이다. 이것은 자기 비움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비움은 보다 큰 채움이다. 작은 채움엔 분쟁과 분열이 있지만 큰 채움에는 평화와 안락이 있다. 이 일을 위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서로 다른 종교를 향해 기쁘게 답해야 한다. 가을 들길에 바람이 분다. 벼들이 일렁이자 그 바람은 황금빛 바람이 된다. 그리고 농부가 웃는다. 행복한 세상이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꿈꾸는 일 아닌가.

2011-09-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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