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구 전국부장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이 지난달 17일 내놓은 총선 불출마 선언문은 근래 본 정치인의 글 가운데 가장 솔직해 보였다. 한국당의 퇴행적인 정치 행태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꿰뚫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우린 적어도 좀비 소리는 듣지 않지 않느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민주당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한국당만큼 민주당에서도 마음이 떠난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당과 민주당이 김 의원이 정확하게 읽은 민심에 둔감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구석은 바로 상대방이다. 한국당은 “우리를 안 찍고 문재인 좌파 정권의 폭주를 끝낼 재간이 있느냐”며 유권자를 윽박지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20대 국회를 이처럼 고사시킨 배짱을 설명할 길이 없다. 민주당은 “우리를 안 찍으면 황교안 대통령 시대가 온다”며 유권자를 윽박지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혁의 완벽한 퇴보를 설명할 길이 없다. 거대 양당이 유권자를 볼모로 잡고 있는 꼴이다.
유권자들은 내년 총선에서 ‘볼모 정치’를 탈출할 수 있을까. 조짐은 보인다. 우선 ‘민주 vs 반민주’, ‘보수 vs 진보’라는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유권자들의 요구가 넘쳐 난다. 공정 이슈를 놓고도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를 따질 정도로 담론의 수준이 성숙해졌다. 젠더, 노동, 생태에 대한 민감도도 어느 때보다 높다. ‘민주·진보’ 또는 ‘애국·보수’라는 큰 우산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20~30대가 유권자의 주류가 됐다. 서복경 서강대 연구교수는 “2016년 총선과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여론조사가 완전히 틀렸던 가장 큰 이유는 유권자들의 다양성을 측정할 수 없는 고리타분한 설문 문항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당이냐 민주당이냐를 묻는 방식으로는 더이상 민심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거대 양당은 유권자의 ‘볼모 정치’ 탈출 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애써 눈감고 있다. “내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에 실소를 보내면서도 “내가 조국이다”라는 구호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흘려보낸다. 유권자를 볼모로 잡아 놓고 상대방의 자살골만 기다린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이를 ‘생각의 아비투스(버릇)’라고 했다. 몸의 습관처럼 정치권의 생각도 볼모 정치에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볼모 정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제3, 제4의 신진세력이 국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비례성이 강화된 선거제도를 실시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밀어올리는 뜨거운 어젠다는 소선거구제라는 병목에 막혀 국회로 들어가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요구가 커질수록 병목 현상은 심화되고, 시민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정당 득표율대로 전체 국회 의석수를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시되면 태극기 부대나 극단적 종교 집단까지 원내에 진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국회에 들어가면 지금처럼 광화문에서 “대통령을 단두대에 세우자”고 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병목 현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유권자들은 대거 투표를 포기할 것이다. 투표를 포기한 유권자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볼모 정치를 끝장내기 전에 거대 양당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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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