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서울
영상시대가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 펴낸 ‘화씨 451’은 500년 뒤(25세기) 미국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인데, 뜻밖에도 오늘의 한국 사회에 잘 들어맞는다. 소설에서 미래의 미국 사회는 사람들에게 독서금지령을 내리고, 대신 영상오락물에만 탐닉하도록 한다. 금서목록이 100만 권에 달한다. 책 읽기를 금지당한 사람들은 밤낮 거실 벽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 빠져 산다.
사람들은 속도에 익숙하다. 걸어 다니거나 자동차를 천천히 몰았다가는 감옥행이다. 시속 60킬로미터로 차를 운전하다가, 서행했다는 이유로 잡혀 가서 이틀 동안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다. 외곽 도로의 광고판들은 길이가 60미터씩이나 된다. 옛날에는 6미터 정도였으나 차들이 너무 빠르게 달리다 보니 광고판도 길어졌다. 그래야 보이기 때문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찬찬히 관찰하고 음미할 여유도 없는 삶이다.
주인공 몬태그의 직업은 ‘파이어맨’(fireman)이다. 통상 불 끄는 ‘소방관’(消防官)으로 옮겨야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불 지르는 ‘방화수’(放火手)로 옮겨야 맞다. 그의 임무는 책을 몰래 보관하거나 빼돌리는 ‘배교자들’을 색출해 책과 함께 불태우는 것이다. 책을 접하는 경로는 법으로 철저히 차단돼 있다. 주인공의 아내는 허구한 날 대형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1953년 출간된 이 소설은 오늘의 한국 현실을 보여 준다. 집집마다 거실에 비치된 초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을 70년 전에 예견했다는 것이 놀랍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래 사회의 특징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미 구현돼 있다.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책을 못 읽도록 불태우는 것으로 돼 있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국민 대부분이 스스로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수다.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책 읽기 좋은 시절도 없다. 이 상황을 독서운동의 기회로 삼는 건 어떨까. 독서의 추락은 인간의 추락을 동반한다.
2020-04-15 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