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 유임이 현실적 선택 주장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13일째로 접어들면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보다는 임기 만료까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무바라크 대통령이 당장 물러날 경우 60일 안으로 대선을 치러야 하고 정치개혁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 오히려 안정을 해친다는 논리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네이선 브라운 교수는 “야권의 핵심 요구사항인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며 “무바라크를 없애면 상황을 정말 복잡하게 만드는 헌법 절차에 빠져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치개혁에 시동이 걸릴 때까지 무바라크 대통령이 좀 더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금껏 무바라크 대통령을 강력 비판해온 진영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집트의 저명한 인권변호사인 호삼 바흐가트는 “이번 시위를 통해 정권을 무너뜨렸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면서 현 상황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반정부 시위의 기세가 지난 4일 금요기도회 이후 상당히 누그러진데다 국제사회 역시 무바라크 대통령의 조기 퇴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현실적 한계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집트 정부와 야권 단체들은 6일 회의를 열고 개헌위원회 구성과 대통령 연임 규정 신설,비상계엄법 폐지 등에 합의한 것도 이같은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무바라크 지지자들은 의회가 이 같은 정치개혁 합의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국정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의견을 펴고 있다.
최근 다른 각료와 함께 사퇴한 뒤 두바이에 머무르고 있는 라치드 모하메드 라치드 전 통상장관은 앞으로 몇 달간 이집트의 권력이양 과정에 무바라크 대통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과도기를 관리할 지도자가 없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라치드 전 장관은 아울러 혼란기 지도력 부재 탓에 해외 투자자의 신뢰가 악화하고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각국 지도자들도 이집트 국민이 원하면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면서도 즉각 퇴진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제안보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6일 기자들과 만나 무바라크 대통령이 그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평화협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이집트의 국정 불안이 중동 평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까 우려했다.
반 총장은 앞서 3일에는 “이번 시위는 이집트 국민의 거대한 불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권력 이양을 촉구,이집트 정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반 총장은 이번 기자회견에서는 무바라크의 퇴진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조속한 개혁을 촉구하면서 “지역 평화와 안정에 부정적이고 급작스러운 영향을 끼치지 않는,질서 있고 평화적인 (권력) 이행 방식을 원한다”며 발언 수위를 낮췄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집트 특사인 프랭크 와이즈너는 5일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이집트의 변화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순조롭게 나아가려면 무바라크 대통령이 현직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역시 갑작스러운 권력이양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주도하는 개혁에 지지를 표했다.
또 유럽연합(EU)의 권터 외팅거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중동 지역 혼란 속에서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을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보다는 오는 9월 대선까지 개혁을 관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야권 지도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당장 물러나고 대통령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한 집권 국민민주당(NDP)이 의회를 장악한 현실에서 순조로운 정치개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계속되고 있다.
카이로.뮌헨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