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앞바다 ‘보물선’이 보여주는 중세의 역동성

신안 앞바다 ‘보물선’이 보여주는 중세의 역동성

입력 2014-04-02 00:00
수정 2014-04-0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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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1975년 8월20일,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한 어민의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왔다. 문화재 당국은 이들 도자기가 중국 송(宋)~원(元) 시대에 만들어져 매우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했다.

이후 여러 차례 추가 조사와 수중발굴이 이뤄지면서 이 지점에 엄청난 양의 유물을 실은 배가 침몰한 사실이 확인됐다. 고려청자를 비롯해 도자기만 2만661점에 달했고, 청동거울, 주전자, 잔, 접시, 악기 등 수많은 물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 배는 고려 말기 한·중·일 3국을 오가던 중국 무역선이었고, 원 제국이 완성되고서 40여년 후인 1323년 중국 푸젠(福建)성 촨저우(泉州)항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 하카다(博多)항으로 가던 중 침몰했다는 것이 학계의 조사 결과다.

국내 수중고고학 역사상 첫 발굴로 기록되는 ‘신안선’ 이야기다. 발굴된 유물의 가치도 가치였지만, 당시 최첨단의 초대형 선박이던 이 ‘보물선’이 왜 진귀한 물건을 잔뜩 싣고 신안 앞바다를 지났는지부터가 학문적 연구 대상이었다.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서동인·김병근 지음)는 신안선과 거기에 실린 유물들을 1323년의 ‘타임캡슐’로 삼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중세시대 사회상과 시대의 흐름, 국가 간 교역관계, 상인들의 활동 등을 재구성한 책이다.

촨저우가 당(唐)대부터 상업항이었고 송·원대에는 중동과 유럽에까지 알려진 국제무역항이었다는 점, 14세기 초 이처럼 많은 귀중품을 실은 대형 무역선이 운용된 점 등을 보면 바다를 무대로 한 중세상인들의 활약상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신안선이 운항하던 무렵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과 서아시아가 가까워졌고, 13세기 원 제국은 이라크와 시리아까지 진출했다. 육로와 바닷길로 오가는 정보는 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했다.

원 제국과 수십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고려 백성들의 민생고는 극에 달했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고 바다에서 미래를 찾으려 한 상인과 지식층이 있었다. 원 제국으로부터 홀대받은 과거 남송 지역 옛 귀족들도 상인으로 변신해 바다로 나갔다. 신안선이 상징하는 중세 해상무역 시대의 주인공은 이런 이들이었다.

대형 무역선에 상품을 가득 싣고 먼 바닷길을 오가는 이들 중세상인의 모습에서 저자들은 국가 간 교류와 교역 증가, 수공업 생산력 증대 등 중세시대 나타난 사회적 변화를 포착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안선에 실렸던 도자기, 차, 한약재, 불교용품 등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중세 산업구조와 문화를 읽어내는 단초가 된다.

저자들은 “신분 차별, 빈부 갈등, 정치적 압제 등 개인의 발전과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가 많은 시대였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며 “신안선은 상인들의 치열한 삶과 중세시대 여러 나라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라고 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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