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 뒤집어쓴 흑백 화면… 이게 뭔가 싶은, 그런 희망

똥물 뒤집어쓴 흑백 화면… 이게 뭔가 싶은, 그런 희망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24-02-29 03:22
수정 2024-02-29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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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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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준지
사카모토 준지
질감은 물론 냄새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인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싶다가도 영화를 보다 보면 거부감이 옅어지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고쳐 앉게 된다. 지난 21일 개봉한 ‘오키쿠와 세계’는 일본 사회파 감독의 대표 주자 사카모토 준지(66)의 서른 번째 작품이다. 영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시대(1603~1868)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구로키 하루)와 인분을 사고파는 똥지게꾼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 추지(간 이치로)의 사랑과 우정을 잔잔하게 담아냈다.

당시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세계’라는 단어가 나온다. 정부 관료였지만 몰락해 버린 오키쿠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하늘의 끝은 어딘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세계”라며 사랑에 눈뜬 똥지게꾼 청년 추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해 줘”라고 당부한다.

지난 26일 내한해 기자들과 만난 사카모토 감독은 “270년간 이어졌던 에도 시대의 말기는 개국과 함께 공포와 희망이 공존할 때였다. 과거의 세계가 닫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때”라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와 당시가 겹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자신이 만든 영화들에 대해 “절망적인 상황으로 끝나거나 주인공이 죽는 영화가 많았지만 이번 영화는 가급적 희망적으로 끝내고 싶었다”면서 “코로나19 시기에 제작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똥 범벅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유쾌하게 농담을 건넸다.

거장 감독임에도 이번 영화는 투자를 받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분뇨가 수시로 등장하는 데다 흑백 촬영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분뇨는 골판지를 갈아 넣고 식용유와 여러 재료를 섞어 발효해 만들었다. 적당한 거품을 내기 위해 녹차 가루를 넣기도 했단다. 등장인물이 똥을 뒤집어쓰는 내용도 나오기에 식재료를 사용해야 했다. “미술감독의 작품인데 완성도가 워낙 뛰어나 스태프가 ‘똥의 마에스트로’, ‘똥 소믈리에’로 불렀다”며 파안대소했다.

2024-02-2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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