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들보만큼 중요한 나무 조각

대들보만큼 중요한 나무 조각

입력 2012-04-29 00:00
수정 2012-04-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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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중반 LG 트윈스에 김영직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노장’이라는 소리를 듣기 훨씬 전부터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격도 느긋하거니와 몸놀림이 워낙 느렸기 때문이다. 그가 공격할 때는 민첩한 주루플레이(베이스 사이를 달리는 것)를 기대할 수 없었다. 재빨리 공을 처리해야 하는 수비수로서도 낙제점이었다. 물론 요즘 이대호나 김태균처럼 좀 굼뜨더라도 크게 ‘한 방’을 때릴 수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겠건만, 그는 그런 힘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당시엔 흔치 않았던 왼손 타자라는 점, 그리고 어떤 공이든 방망이로 잘 맞힌다는 점 정도였다. 거기에 억지로 하나 더한다면, 종종 ‘답답하다’거나 ‘속 터진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침착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도 매 순간 살벌한 경쟁이 이어지는 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 9년을 버텼다. 종종 평론가들에게 ‘팀 공격의 열쇠 같은 선수’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의 보직은 바로 ‘대타’였다. 수비수로 쓸 수도 없고, 주전 선수로 넣기에도 부족한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었다. 칼끝처럼 날이 선 승부의 순간에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 유일한 선수가 김영직이었다. 그는 공격의 물꼬를 터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확률 높은 성공을 보장했다. 그가 선수인생 9년 동안 쳐낸 안타는 512개에 불과했지만, 그 안타로 얻은 점수(타점)는 무려 220점이나 될 정도다. 특히 팀이 우승했던 1990년과 1994년에는 불과 54개와 53개의 안타로 각각 40타점을 만들어내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1990년 한국시리즈 2차전. 9회 말까지 2대 1로 지고 있을 때 상대편 투수에게서 동점 적시타를 뽑아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더니, 연장 11회 말에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승점을 만들어낸 선수가 김영직이었다. 1994년 한국시리즈 3차전. 태평양의 정민태에게서 5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도 만들어내지 못할 때 대타로 등장해 2루타를 때려내며 돌파구를 연 데 이어, 바뀐 투수 정명원에게선 동점타까지 때려내 ‘4연승 우승’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던 선수 역시 김영직이었다.

하루건너 한 번씩, 그것도 한 경기에 한 번 혹은 많아야 두 번쯤 타석에 서는 선수가 대타다. 주로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나, 왼손 타자에게 약한 투수 앞에서 찬스가 생겼을 때다. 그때 안타라도 치면 발 빠른 대주자와 교체되어 다시 벤치로 돌아오는 것이 대타의 운명이다. 그래서 대타가 되기를 꿈꾸는 야구선수는 없다. 누구나 주전이 되기를 꿈꾸고,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빈틈이 있으면 보완하고, 없는 특기라도 하나 개발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모든 선수의 삶이다.

하지만 김영직은 보장된 출장 기회를 욕심내는 대신 아무 때고 ‘왼손 타자’가 필요한 순간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했고, 주어진 기회에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는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됐고, ‘전문 대타’라는 영역을 개척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묵묵히 대타의 본분에 충실해 결정적인 순간을 연출한 김영직이 없었다면, LG 트윈스의 두 차례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타’라는 단어는 여전히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아쉬운 대로 욱여넣기. 나중에 제대로 수습하기 전까지만 일단 메워 넣기. 그러나 김영직을 보며 깨닫는 것은, 어떤 건물도 커다란 재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와를 업고 천장을 버티는 대들보나 기둥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잇고 군데군데 빈틈을 채우는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 덕분에 알았다. 세상에는 채워진 곳만큼이나 많은 빈틈이 있고,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거대한 완성품이 아니라 딱 그 틈만큼의 몸집을 가진 조각이다. 김영직은 그런 선수였다.

글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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