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송대관의 유족이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https://img.seoul.co.kr/img/upload/2025/02/09/SSC_20250209144630_O2.jpg.webp)
![가수 송대관의 유족이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https://img.seoul.co.kr//img/upload/2025/02/09/SSC_20250209144630_O2.jpg.webp)
가수 송대관의 유족이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후배 가수들이 송대관의 대표곡 ‘해 뜰 날’을 합창하자 영결식장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한가수협회 회장인 이자연은 조사를 통해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오빠,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라며 오열했고, ‘절친’으로 꼽히는 태진아는 “아 영원한 나의 라이벌이여. 대관이 형, 잘 가”라며 울먹였다.
58년 동안 노래로 국민을 위로한 가수 송대관의 영결식이 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유족을 비롯해 가수 강진, 설운도 등 동료 70여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고인을 향한 묵념과 약력 소개로 시작했다. 가수 이자연과 태진아가 각각 조사와 추도사를 올렸고, 설운도는 “가수는 결국 무대에서 시작해 무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까지 무대에서 하고 싶은 일을 웃으면서 하시다 가셨기에 마음은 아프지만 위안이 된다”며 애도했다. 이후 강진, 김수찬 등 후배 가수들이 고인의 대표곡 ‘해 뜰 날’을 조가로 합창하며 영결식은 마무리됐다.
![가수 송대관의 영결식에서 후배 가수들이 고인의 대표곡인 ‘해 뜰 날’을 합창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5/02/09/SSC_20250209144635_O2.jpg.webp)
![가수 송대관의 영결식에서 후배 가수들이 고인의 대표곡인 ‘해 뜰 날’을 합창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5/02/09/SSC_20250209144635_O2.jpg.webp)
가수 송대관의 영결식에서 후배 가수들이 고인의 대표곡인 ‘해 뜰 날’을 합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대관은 앞서 지난 7일 79세로 별세했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그는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뒤 ‘해 뜰 날’, ‘유행가’, ‘네박자’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70년대 경제 발전 시기에 서민의 마음을 다독이는 노래로 희망을 안겨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5년 ‘해 뜰 날’로 스타 반열에 오른 그는 이듬해 국내 방송 3사의 가요대상을 석권하고 가수왕까지 올랐다.
1980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른 그는 198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발표한 ‘정 때문에’를 시작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차표 한 장’, ‘인생은 생방송’,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 히트곡을 잇달아 내면서 명실상부한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후반엔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부활을 이끌면서 ‘트로트 4대 천왕’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고인은 경기 안성 유토피아추모관에서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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