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받은 돈으로 똑같은 벨벳정장 7벌을 사서 평생 입은 남자…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온 남자
매일 우산을 들고 다니지만 정작 비가 올 때는 우산이 젖지 않도록 고이 품 안에 넣고 비를 맞는 남자, 흰색으로만 된 음식을 먹었던 유별난 남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고독한 남자, 작곡가라기 보다 발명가로 불린 남자, 음악 형식이나 기법도 모두 무시해버린, 음악 역사상 최고의 괴짜 작곡가였던 남자, 카페 피아니스트로 음악사에 등장한 최초의 음악가인 남자, 르누아르의 ‘부지발에서의 댄스’ 속 여인 쉬잔 발라동을 영원히 잊지 못해 독신으로 산 남자, 상속받은 돈으로 똑같은 벨벳정장 7벌을 사서 평생 그 옷만 입었던 남자,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온 남자….
클래식 애호가들에겐 이쯤 얘기하면 누구인지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어도 OOO침대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을 떠올리면 낯설지만은 않을 터이다. 가구음악으로 유명한 프랑스 괴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다. 가구처럼 편안한 음악, 가구음악(Furniture Music)의 장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 국가지점번호를 만나 내 위치 파악하고… 정상이 없는 정상에 오르다
매니에르 질환에 시달렸던 기자가 숲에 접어 들었다. 그 병에 걸린 이후로 이어폰을 낄 수 없다. 이어폰을 낄 수 없어 이젠 좋다. 이어폰이 없으니 조용한 아침을 만끽 할 수 있다. 정말 고요한 아침이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제1번이 잔잔하게 흘러 나온다. 백색 소음처럼 편안하다. 수면음악에 가깝다.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아, 마치 이 음악과 커피 한잔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다. 인생 뭐 있나?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충만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는가.
소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숲길이 아름답다. 인적도 거의 없다. 커브 길에서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속이 나타난다. 오르막길에서부터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포장도로가 끝날 무렵에는 오솔길에 풀이 무성히 자라 지나가기가 꺼려진다. 수풀더미다. 인적이 드물어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부리나케 걸었더니 언덕 위에 국가지점번호 ‘다나 0673 9309’ 팻말이 나타난다. 길을 잃었을 때나 위급한 상황에서 이 국가지점번호만 알려주면 금세 내 위치를 파악해 구조해줄 좌표다. 국가지점번호는 전국을 정사각형 격자로 나누고 전국을 하나의 좌표체계로 표현한다. 가장 상세하게 표시하면 한글문자 2개와 아라비아 숫자 8개가 된다.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초행길 등산로에 접어들었다가 이 표시를 만나면 무조건 휴대전화에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정말 반가운 번호가 아닐 수 없다.
그 푯말 아래 산불 조기 발견 목적 등으로 설치된 폐쇄회로(CC)TV 설치 안내문이 있고 그 위에 통신시설같은 전봇대가 높이 서 있다. 짐노페디 제1번을 무한반복하던 음악이 멈출 때쯤 정상에 도달했다. 근데 정상이라고 할만한 전망대가 없다. 이 CCTV설치물이 전부다. 그 주변은 숲 속이다.
#노루들의 쉼터를 침범한 침입자 신세… 길을 잃고 길을 찾다제주시 연동에서 가까운 한라산 가는 초입에 있는 표고 616m 노루손이 오름의 정상은 뷰가 없다. 보잘 것 없는 산. 노리손이오름, 노루생이오름 등으로도 불린다. 북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지니고 있고, 화구 끝자락에는 조그만 알오름이 있다. 예전에는 벌거숭이 오름이었으나 지금은 삼나무, 소나무, 측백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탐라지’에 ‘노로객악(勞老客岳)’, 이형상의 ‘탐라순려도’등에는 ‘장손악(獐遜岳)’이라 했다. ‘조선지형도’등에는 ‘장악(獐岳)’으로 표기했다.
노리(노루의 제주어)에 ‘소다(쏘다의 고어)’의 관형어인 ‘손’이 더해져 노루손이, 노리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예부터 이 지역에 노루가 많아 노루를 사냥하기 좋은 터라서 노루손이오름이라고 불린 듯 하다.
실제 정상에서 올라왔던 길 반대방향으로 마냥 걷다 길을 잃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벌목한 흔적들이 남아있어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길이 사라졌다. 아마도 길을 잘못 들어선 듯 하다. 그 순간 길이 아닌 곳에 서 있는 나를 누군가가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내 꺼억 꺼억 울더니 소스라치게 놀란 듯 폴짝 폴짝 뛰며 노루가 삽시간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주위 동료 노루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듯, 속울음을 토해내듯, 소리내자 주변 수풀에 있던 새끼 노루들도 어미들을 좇아 어디론가 금세 사라졌다.
방향감각 만큼은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다가 순간 길을 잃었지만 햇살을 향해 걸어갔다. 내겐 국가지점번호가 있지 않은가. ‘여차하면 구조 요청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휴대폰 통화가능한 구역이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햇살을 향해 오르막으로 다시 오르자 다행히 정상 아닌 정상에서 만났던 CCTV 설치물로 돌아왔다. 오름 이름처럼 이곳은 사람들의 쉼터가 아니라 노루들의 쉼터였다. 노루들을 놀라게 해 도망치게 한 난 그곳을 허락없이 침범한 침입자였다.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숲을 빠져 나왔다. 정상에서 탁 트인 뷰를 맛보지 못한 아쉬움은, 노루손이오름 바위 팻말 앞에 펼쳐지는 한라산 아흔아홉골과 어승생악이 펼쳐지는 절경으로 충분히 보상받는 듯 했다.
사실 노루손이오름은 한여름보다 한겨울에 와야 제격이다. 왜냐하면 초입 오른편에서 펼쳐지는 드넓은 언덕 들판의 설경이 캘린더를 찢고 나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눈썰매장으로 변하는 곳이다.
#사티의 음악처럼 느리게 혹은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비통하게, 슬프게, 장중하게 걷다
사티는 음악적 지시어들인 ‘크레센도(점점 세게)’,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에스페시보(감정을 넣어서)’처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말들을 사용하는 대신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등 해독하기 어려운 지시어들을 사용했단다. 괴상한 문장들로 인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연주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단다. 그러나 사티는 자신의 의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최초의 작곡가였다고 했다. 그는 작곡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노루손이오름을 산책할 땐 나만의 계절에, 나만의 시간에, 나만의 호젓함과 낭만을 즐기면 족하다. 사티의 짐노페디 3악장처럼 ‘비통하게, 슬프게, 장중하게’ 라는 연주 지시를 따라가듯 소파처럼 편안한 선율에 몸을 맡기면 된다.
노루손이오름은 안단테 칸타빌레(걸어가듯 조금 느리게 노래하듯이), 혹은 아다지오(느리고 장중하게) 정도로 느림의 음악으로 산책하면 더없이 좋은 곳이다. 길이 없으면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좋다. 길이 끊기면 되돌아오면 된다. 정상에 오르는게 목적은 아니지 않는가. 정상을 향한 인생만이 인생은 아닐 것이다. 때론 오르다 산허리쯤에서 쉬다가 돌아와도 나쁘지 않다. 사장 찍고 회장 찍어야만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 소파에 누운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느꼈다면 거기서 정상을 향한 걸음을 멈춰도 좋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아들 낳아달라 빌까” 천왕사 · “수능기도 올릴까” 석굴암
추석 연휴 성묘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마음을 채워주는 곳에 들르고 싶다면 천왕사만큼 시의적절한 곳도 없을 듯 하다. 풍경소리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맘때쯤 되면 이런 사람들의 발길이 더 잦아진다. 수능을 앞둔 자식을 위해 100일 기도 하는 사람들. 노루손이오름에서 차로 중문 방향으로 5분여 달리면 팻말이 나온다.
천왕사는 한라산 어승생 동쪽에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골(구구곡)중 하나인 금봉곡 아래 위치한 사찰이다. 효리네 민박에도 나와 유명세를 치렀다.
1955년 현재의 천왕사 삼성각 근처에 있던 토굴에서 참선수행하던 비룡스님에 의해 수영산선원이란 명칭으로 창건됐다. 1967년 12월 천왕사로 사찰명을 변경했다. 건립된 지 오래되지 않은 사찰임에도 1994년 4월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천왕사 주변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나한 기도 영험 도량으로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란다. 절 주변의 세존바위, 보살바위, 남근바위 등 기묘한 바위와 적송 숲이 더해져 천왕사 명성을 높였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남근바위 앞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점지해줄 것처럼 영험한 모양새다.
천왕사에서 삼배를 드리고 내려오다가 오른쪽 산책로에 접어들면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석굴암 가는 곳이다.
제주도에도 석굴암이 있었나 싶어 궁금한 마음에 올라간다. 올라가는 내내 금강송보다 우수한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붉은 색깔을 띠고 있는 적송이다. 처음엔 햇빛에 타들어갔나 착각이 들 만큼 붉은 기운이 감돌아 희귀한 보호종이라고 느껴졌다.
그 적송들을 끼고 오르막 계단을 수없이 지나서 나무데크가 있는 절정에 다다르면 계곡 어디에선가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1947년 월암당 강동은 스님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으로 월암 스님이 기도처를 찾기 위해 아흔아혼골내 선녀폭포 위쪽에 자리한 궤에서 천일 기도를 드리고 회향하던 날, 작은새의 인도를 받아 지금의 석굴암 터를 정해서 지었다고 한다. 세상시름 덜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 합격의 간절함을 기원하는 기도객과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험하고 험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사찰 자체는 누추하고 초라하지만 웬지 ‘기도발’이 먹힐 것만 같아 배추돈을 불전함에 올려놓고 오지 않을 수 없다.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걸쭉한 농담으로 배꼽을 잡게 만드는 G선배가 얼마 전 가족이 십시일반 모아 추석 선물로 부모님에게 별5개짜리 OOO침대를 할까,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OOO침대를 할까 고민중이라는 얘기를 했다. 이상하게 부러웠다. 오래전 양지공원(납골당)에 부모를 모신 나, 술 한잔이라도 정성껏 올려 드려야겠다. 살아 계실때 보살피지 못한 불효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선배님, 살아 계실 때 효도 많이 하세요.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요.”
노루들의 쉼터 제주시 연동 노루손이오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매일 우산을 들고 다니지만 정작 비가 올 때는 우산이 젖지 않도록 고이 품 안에 넣고 비를 맞는 남자, 흰색으로만 된 음식을 먹었던 유별난 남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고독한 남자, 작곡가라기 보다 발명가로 불린 남자, 음악 형식이나 기법도 모두 무시해버린, 음악 역사상 최고의 괴짜 작곡가였던 남자, 카페 피아니스트로 음악사에 등장한 최초의 음악가인 남자, 르누아르의 ‘부지발에서의 댄스’ 속 여인 쉬잔 발라동을 영원히 잊지 못해 독신으로 산 남자, 상속받은 돈으로 똑같은 벨벳정장 7벌을 사서 평생 그 옷만 입었던 남자,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온 남자….
클래식 애호가들에겐 이쯤 얘기하면 누구인지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어도 OOO침대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을 떠올리면 낯설지만은 않을 터이다. 가구음악으로 유명한 프랑스 괴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다. 가구처럼 편안한 음악, 가구음악(Furniture Music)의 장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40>느린 산책 노루손이오름
# 국가지점번호를 만나 내 위치 파악하고… 정상이 없는 정상에 오르다
제주시 연동 노루손이오름 초입에서 시작되는 울창한 소나무와 삼나무 숲길. 제주 강동삼 기자
매니에르 질환에 시달렸던 기자가 숲에 접어 들었다. 그 병에 걸린 이후로 이어폰을 낄 수 없다. 이어폰을 낄 수 없어 이젠 좋다. 이어폰이 없으니 조용한 아침을 만끽 할 수 있다. 정말 고요한 아침이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제1번이 잔잔하게 흘러 나온다. 백색 소음처럼 편안하다. 수면음악에 가깝다.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아, 마치 이 음악과 커피 한잔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다. 인생 뭐 있나?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충만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는가.
소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숲길이 아름답다. 인적도 거의 없다. 커브 길에서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속이 나타난다. 오르막길에서부터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포장도로가 끝날 무렵에는 오솔길에 풀이 무성히 자라 지나가기가 꺼려진다. 수풀더미다. 인적이 드물어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부리나케 걸었더니 언덕 위에 국가지점번호 ‘다나 0673 9309’ 팻말이 나타난다. 길을 잃었을 때나 위급한 상황에서 이 국가지점번호만 알려주면 금세 내 위치를 파악해 구조해줄 좌표다. 국가지점번호는 전국을 정사각형 격자로 나누고 전국을 하나의 좌표체계로 표현한다. 가장 상세하게 표시하면 한글문자 2개와 아라비아 숫자 8개가 된다.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초행길 등산로에 접어들었다가 이 표시를 만나면 무조건 휴대전화에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정말 반가운 번호가 아닐 수 없다.
그 푯말 아래 산불 조기 발견 목적 등으로 설치된 폐쇄회로(CC)TV 설치 안내문이 있고 그 위에 통신시설같은 전봇대가 높이 서 있다. 짐노페디 제1번을 무한반복하던 음악이 멈출 때쯤 정상에 도달했다. 근데 정상이라고 할만한 전망대가 없다. 이 CCTV설치물이 전부다. 그 주변은 숲 속이다.
노루들의 안식처 노루손이오름 숲길. 제주 강동삼 기자
노루손이오름 산책로에서 만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숲속. 제주 강동삼 기자
#노루들의 쉼터를 침범한 침입자 신세… 길을 잃고 길을 찾다제주시 연동에서 가까운 한라산 가는 초입에 있는 표고 616m 노루손이 오름의 정상은 뷰가 없다. 보잘 것 없는 산. 노리손이오름, 노루생이오름 등으로도 불린다. 북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지니고 있고, 화구 끝자락에는 조그만 알오름이 있다. 예전에는 벌거숭이 오름이었으나 지금은 삼나무, 소나무, 측백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탐라지’에 ‘노로객악(勞老客岳)’, 이형상의 ‘탐라순려도’등에는 ‘장손악(獐遜岳)’이라 했다. ‘조선지형도’등에는 ‘장악(獐岳)’으로 표기했다.
노리(노루의 제주어)에 ‘소다(쏘다의 고어)’의 관형어인 ‘손’이 더해져 노루손이, 노리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예부터 이 지역에 노루가 많아 노루를 사냥하기 좋은 터라서 노루손이오름이라고 불린 듯 하다.
실제 정상에서 올라왔던 길 반대방향으로 마냥 걷다 길을 잃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벌목한 흔적들이 남아있어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길이 사라졌다. 아마도 길을 잘못 들어선 듯 하다. 그 순간 길이 아닌 곳에 서 있는 나를 누군가가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내 꺼억 꺼억 울더니 소스라치게 놀란 듯 폴짝 폴짝 뛰며 노루가 삽시간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주위 동료 노루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듯, 속울음을 토해내듯, 소리내자 주변 수풀에 있던 새끼 노루들도 어미들을 좇아 어디론가 금세 사라졌다.
방향감각 만큼은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다가 순간 길을 잃었지만 햇살을 향해 걸어갔다. 내겐 국가지점번호가 있지 않은가. ‘여차하면 구조 요청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휴대폰 통화가능한 구역이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햇살을 향해 오르막으로 다시 오르자 다행히 정상 아닌 정상에서 만났던 CCTV 설치물로 돌아왔다. 오름 이름처럼 이곳은 사람들의 쉼터가 아니라 노루들의 쉼터였다. 노루들을 놀라게 해 도망치게 한 난 그곳을 허락없이 침범한 침입자였다.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숲을 빠져 나왔다. 정상에서 탁 트인 뷰를 맛보지 못한 아쉬움은, 노루손이오름 바위 팻말 앞에 펼쳐지는 한라산 아흔아홉골과 어승생악이 펼쳐지는 절경으로 충분히 보상받는 듯 했다.
사실 노루손이오름은 한여름보다 한겨울에 와야 제격이다. 왜냐하면 초입 오른편에서 펼쳐지는 드넓은 언덕 들판의 설경이 캘린더를 찢고 나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눈썰매장으로 변하는 곳이다.
노루손이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 탐방객 위치를 알려주는 국가지점번호, CCTV설치된 정상 아닌 정상. 제주 강동삼 기자
#사티의 음악처럼 느리게 혹은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비통하게, 슬프게, 장중하게 걷다
노루손이오름 초입 남쪽으로 펼쳐지는 한라산 아흔아홉골이 펼쳐진다. 제주 강동삼 기자
사티는 음악적 지시어들인 ‘크레센도(점점 세게)’,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에스페시보(감정을 넣어서)’처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말들을 사용하는 대신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등 해독하기 어려운 지시어들을 사용했단다. 괴상한 문장들로 인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연주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단다. 그러나 사티는 자신의 의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최초의 작곡가였다고 했다. 그는 작곡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노루손이오름을 산책할 땐 나만의 계절에, 나만의 시간에, 나만의 호젓함과 낭만을 즐기면 족하다. 사티의 짐노페디 3악장처럼 ‘비통하게, 슬프게, 장중하게’ 라는 연주 지시를 따라가듯 소파처럼 편안한 선율에 몸을 맡기면 된다.
노루손이오름은 안단테 칸타빌레(걸어가듯 조금 느리게 노래하듯이), 혹은 아다지오(느리고 장중하게) 정도로 느림의 음악으로 산책하면 더없이 좋은 곳이다. 길이 없으면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좋다. 길이 끊기면 되돌아오면 된다. 정상에 오르는게 목적은 아니지 않는가. 정상을 향한 인생만이 인생은 아닐 것이다. 때론 오르다 산허리쯤에서 쉬다가 돌아와도 나쁘지 않다. 사장 찍고 회장 찍어야만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 소파에 누운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느꼈다면 거기서 정상을 향한 걸음을 멈춰도 좋다.
노루손이오름에서 차로 중문방면으로 5분정도 달리면 나오는 천왕사 사찰.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아들 낳아달라 빌까” 천왕사 · “수능기도 올릴까” 석굴암
천왕사 경내에서 만나는 약사여래상, 남근바위,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추석 연휴 성묘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마음을 채워주는 곳에 들르고 싶다면 천왕사만큼 시의적절한 곳도 없을 듯 하다. 풍경소리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맘때쯤 되면 이런 사람들의 발길이 더 잦아진다. 수능을 앞둔 자식을 위해 100일 기도 하는 사람들. 노루손이오름에서 차로 중문 방향으로 5분여 달리면 팻말이 나온다.
천왕사는 한라산 어승생 동쪽에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골(구구곡)중 하나인 금봉곡 아래 위치한 사찰이다. 효리네 민박에도 나와 유명세를 치렀다.
1955년 현재의 천왕사 삼성각 근처에 있던 토굴에서 참선수행하던 비룡스님에 의해 수영산선원이란 명칭으로 창건됐다. 1967년 12월 천왕사로 사찰명을 변경했다. 건립된 지 오래되지 않은 사찰임에도 1994년 4월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천왕사 주변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나한 기도 영험 도량으로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란다. 절 주변의 세존바위, 보살바위, 남근바위 등 기묘한 바위와 적송 숲이 더해져 천왕사 명성을 높였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남근바위 앞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점지해줄 것처럼 영험한 모양새다.
천왕사에서 삼배를 드리고 내려오다가 오른쪽 산책로에 접어들면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석굴암 가는 곳이다.
석굴암 가는 길에 만나는 한라산 적송 군락지. 제주 강동삼 기자
석굴암 가는 길 휴식 데크 옆에서 만난 아찔한 절벽.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도에도 석굴암이 있었나 싶어 궁금한 마음에 올라간다. 올라가는 내내 금강송보다 우수한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붉은 색깔을 띠고 있는 적송이다. 처음엔 햇빛에 타들어갔나 착각이 들 만큼 붉은 기운이 감돌아 희귀한 보호종이라고 느껴졌다.
그 적송들을 끼고 오르막 계단을 수없이 지나서 나무데크가 있는 절정에 다다르면 계곡 어디에선가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1947년 월암당 강동은 스님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으로 월암 스님이 기도처를 찾기 위해 아흔아혼골내 선녀폭포 위쪽에 자리한 궤에서 천일 기도를 드리고 회향하던 날, 작은새의 인도를 받아 지금의 석굴암 터를 정해서 지었다고 한다. 세상시름 덜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 합격의 간절함을 기원하는 기도객과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험하고 험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사찰 자체는 누추하고 초라하지만 웬지 ‘기도발’이 먹힐 것만 같아 배추돈을 불전함에 올려놓고 오지 않을 수 없다.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걸쭉한 농담으로 배꼽을 잡게 만드는 G선배가 얼마 전 가족이 십시일반 모아 추석 선물로 부모님에게 별5개짜리 OOO침대를 할까,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OOO침대를 할까 고민중이라는 얘기를 했다. 이상하게 부러웠다. 오래전 양지공원(납골당)에 부모를 모신 나, 술 한잔이라도 정성껏 올려 드려야겠다. 살아 계실때 보살피지 못한 불효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선배님, 살아 계실 때 효도 많이 하세요.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