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980년대 이후 서정시 전성시대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詩)는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는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다. 1980년대를 겪어 보지 못한 독자라면 그를 국회의원으로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말하자면 “서정시의 전성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 도종환은 언제까지나 시인이다.
‘분단시대 판화시집’에 수록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옆에는 정하수의 판화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서정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70년대가 금서(禁書)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군사정부는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책들을 검열했고, 이미 유통된 책들은 모조리 수거해 없애버렸다. 단행본은 물론 잡지사도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들은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찾지 못해 궁핍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억압에 저항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보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이 서점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60~70년대에 주로 소설이 큰 인기를 누렸다면 이제 다양한 서정시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당시 시집의 인기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홍보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이만한 판매수량을 능가하는 베스트셀러 시집은 나오지 않고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1980년대 베스트셀러 서정시의 시작을 알린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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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종합 베스트셀러 2위를 기록한 이해인 수녀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그해에 집계 순위 2위부터 4위가 모두 이해인 수녀의 시집이었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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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적인 해인데, 분단시대 동인이 함께 펴낸 시집 ‘분단시대 판화시집’에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연작이 처음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었다. 시인이 아내와 사별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썼다는 실제 사연이 알려지자 독자들의 관심은 한꺼번에 도종환 시인에게 쏠렸다. 이듬해에 ‘접시꽃 당신’ 단행본 시집이 출간됐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작은 시집은 100만부 이상이라는 믿기 힘든 판매고를 올리며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를 탄생시킨 애틋한 순애보는 2년 후인 1988년 이덕화, 이보희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되어 도종환 시인의 인기를 연예인급으로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수십년 세월이 지났지만 ‘접시꽃 당신’은 여전히 한 해에 수천권씩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식지 않았다.

성인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은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 판매량 300만부 이상이라는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화가, 철학자, 소설가, 시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칼릴 지브란. ‘예언자’,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등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긴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던 원태연의 시집.

1990년대 중후반에는 원태연의 시집처럼 제목이 긴 사랑시집이 인기를 모았다.

IMF 사태 이후 독자들을 위로하며 독특한 시세계를 선보인 류시화의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각종 명상서적을 편집하는 등 기획력도 인정받아 지금까지 다양한 독자층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시의 모양은 이제 저항시, 서정시, 사랑시처럼 특정한 이름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졌다. 시인의 역할이나 시의 쓰임도 그와 함께 상당히 넓어졌다. 앞으로는 또 어떤 시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릴지 기대가 된다. 시는 곧 그 시대를 잘 설명해 주는 문학이기 때문에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들이 좋아했던 시집을 통해 지나왔던 날들을 돌아보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지금 이 세상도 천상병의 시처럼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을 가지게 되길 희망한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2017-06-12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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