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은씨 70년만에 여중 졸업
“돌아가신 우리 영감 영어 일기장 좀 훔쳐보려고 시작한 공부인데….”
도준석 기자 podo@seoul.co.kr
오는 26일 84세의 나이로 일성여중을 졸업하는 지상은(앞줄 오른쪽)씨가 수업시간 중 맨손체조를 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odo@seoul.co.kr
도준석 기자 podo@seoul.co.kr
‘여든 넘은 여중생’ 지상은(84)씨는 지난 2년 동안 경기 부천 집에서 서울 마포 일성여중까지 1시간 30분 거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학했다. 지씨는 만학도 교육전문기관인 일성여중고를 통틀어 최고령 ‘왕언니’다. 10대 여학생처럼 책가방 메고 도시락 흔들며 지하철과 버스를 하루 3시간씩 탔다. 몸은 고단했지만 배움의 즐거움은 그만큼 컸다. 지씨는 “학교 땡땡이치고 싶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며 웃었다. 방학 없이 공부한 지씨는 오는 26일 간절히 바랐던 중학교 졸업장과 개근상을 함께 받는다.
중학교 졸업장을 받기까지 70년이 걸렸다. 일제강점기에 아버지는 “처녀는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갈 수 있다”며 열일곱 살인 딸의 혼례를 서둘렀다. 그 바람에 교과서를 덮었다. 남편과 아들딸 6남매에다 시부모, 시동생까지 15명인 식구들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며느리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전남 강진에서 잠시 야학을 다녔지만 시아버지의 꾸중에 얼마 못 가 포기했다.
2년 전 어느 날 사소한 사건이 지씨의 학구열에 불을 지폈다. 책상에 놓인 남편의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펴봤더니 온통 영어였다. 궁금한데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일었다. 남편은 약학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였다. “서울에 만학도만 가르치는 여자 중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등록했다. 남편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 노망났는가.”
2011년 1월 입학을 불과 2개월 앞두고 남편이 췌장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사는 “딱 3개월 사실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결국 두 달 만에 아내 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딱 이틀 뒤 일성여중에 입학했다. 외로움을 공부로 달랬다. 모든 게 쉽지 않았지만 뭔가 알아 간다는 짜릿함이 컸다.
“얼마 전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웠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애 여섯을 낳았으니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니까 완전히 딴 세상이더라고.”
우리 근현대사 과목을 배울 때면 자신의 빛바랜 일기장을 꺼내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하철을 타면 지씨의 가방 멘 모습에 호기심을 보이는 나이 든 승객들이 꽤 있다. 지씨는 그때마다 “중학교 다닌다”며 자랑스럽게 학교 명함을 건넨다. 그러면서 “책을 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니 이제라도 공부를 해 보라”고 권한다.
아직 남편의 영어 일기장은 열어 보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바빠 못 읽었다”는 지씨에게 지금은 남편의 일기장 이상으로 궁금한 세상사가 산더미다. 다음 달 지씨는 부천 집 근처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2013-02-12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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