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당시 ‘수출 지장’ 이유로 특허 포기 강요
지연 이자·국가 불법 행위 위자료 포함 총 23여억원
법원 로고. 서울신문DB
1970년대 국가에 의해 염색 기술 특허권을 뺏긴 발명가의 유족에게 국가가 약 7억 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이세라)는 직물 특수 염색 기법인 일명 ‘홀치기’를 발명한 고 신모씨의 자녀 2명에게 국가가 총 7억 3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지연 이자를 더하면 신씨 자녀들이 받을 돈은 총 23억 6000여만원이다.
홀치기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직물 염색 기법이다. 신씨는 이 기법을 발명한 후 약 5년에 걸친 소송전 끝에 1969년 특허권을 얻었다.
이후 1972년 5월 기술을 모방한 다른 업체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해 5억 2000여만원을 배상받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신씨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남산 분실로 끌려가 구금된 채 ‘손해 배상 소송을 취하하고 특허권을 포기한다’는 자필 각서를 쓰도록 강요당했다.
지난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조사 결과 신씨가 특허권 포기를 강요당한 이 사건의 배경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밝혔다.
신씨의 자필 특허권 및 배상금 포기 각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
신씨가 연행되기 전날 열린 수출 진흥 확대 회의에서 홀치기 수출 조합이 상공부 장관에게 “민사 소송 판결 때문에 수출에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건의했고 이를 보고받은 박 전 대통령이 수출업자들을 구제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신씨는 생전인 2006년 1기 진실화해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어 각하됐다. 그는 명예 회복을 하지 못 한 채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유족이 다시 진실 규명을 신청해 지난해 2월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고,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신씨는 불법 감금돼 심리·육체적 가혹 행위를 당해 자기 의사에 반해 소 취하서에 날인하게 됐다”며 “이에 따라 회복하기 어려운 재산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신씨는 자녀가 재차 진실 규명을 신청하기 전에 사망해 생전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좌절됐다”며 “공무원에 의해 조직적이고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가 일어날 경우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신씨가 1972년 손해 배상 소송 1심에서 승소해 받기로 한 5억 2000여만원과 지연 이자, 국가의 불법 행위에 따른 위자료 등을 고려해 총 배상액을 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