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은 따로 없다.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끝내 실종된 박영석(48) 대장의 인생은 처음부터 도전의 행진이었다.박 대장은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어려서부터 탐험 활동에 몸을 던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지켜온 도전 정신은 자서전과 정부 기구에 제출한 자기소개서, 최근 산악계 대선배에게 올린 기고문 등에서 잘 드러난다.
<박영석 대장 산악 등정 기록>
년도 | 대상국 | 산 | 비고 | |
1993 | 네팔 | 에베레스트(8,848m) | 한국최초 무산소 등정 (아시아 최고봉) | |
1994 | 미국 | 맥킨리(6,194m) | 북아메리카 최고봉 | |
1995 | 탄자니아 | 킬리만자로(5,985m) | 아프리카 최고봉 | |
1993~ 2001 | 파키스탄 | K2(8,611m) 등 14개 좌 완등 | 최단시간(8년2개월) 히말라야 14개좌 완등 | |
2001 | 호주 | 코시어스코(2,230m) | 오스트레일리아 최고봉 | |
2002 | 아르헨티나 | 아콩카과 (6,959m) | 남아메리카 최고봉 | |
2002 | 인도네시아 | 칼스텐츠 (4,844m) | 남아시아 최고봉 | |
2002 | 남극 | 빈슨 메시프(5,140m) | 남극대륙 최고봉 | |
2004 | 남극 | 남극점도달 | 남극점 정복(최단기간 무보급) | |
2005 | 북극 | 북극점도달 | 북극점 정복(그랜드슬램 달성) | |
2006 | 네팔 | 에베레스트(8,848m) | 단일팀 최초 횡단등반 성공 | |
2009 | 네팔 | 에베레스트(8,848m) | 코리안 신루트 등정 | |
2011 | 네팔 | 안나푸르나(8,091m) | 코리안 신루트 개척 중 실종 |
◇설악산에서 잔뼈가 굵으며 = 박 대장은 친구가 강원도 설악산에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다고 했다.
친구의 집이 설악산에서 산나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는데 우연히 대청봉에 올랐다가 산에 빠져 방학 때마다 설악산을 올랐다고 설명했다.
박 대장이 산악인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 동국대 마나술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하는 장면을 지켜본 것이다.
등정에 성공한 동국대 원정대가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을 보고 “야, 저거다. 나도 멋진 산악인이 돼보자”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박 대장은 이후 동국대 체육학과에 진학해 바로 산악부에 가입하고서 산악인으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관을 “세상의 주인은 따로 없고,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한계 넘으려고 자신에게 도전 = 박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을 매년 한 두 봉씩 오르다가 1996년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계를 뛰어넘는 선언을 했다.
일년 동안 8,000m급 5개 봉을 연속으로 등정하겠다는 것.
박 대장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5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선언했는데 놀랍게도 선언은 이뤄지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한계로 여겨지는 일을 해내고 나니 히말라야 8,000m 이상 14개 봉우리를 완등하는 거사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박 대장은 다짐대로 2001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고 2005년까지는 3극점 답사와 7대륙 최고봉 완등까지 성취 일기를 써내려 갔다.
스스로 다그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행군한 결과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지던 ‘탐험 그랜드슬램’이 완성된 것이다.
◇북극에서 지옥을 보다 =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랜드슬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룬 박 대장은 자신의 도전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박 대장은 199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하다가 태어나서 가장 크게 오랫동안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고 밝혔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순간 속으로 ‘제발’하고 빌었을 때 몸을 묶어 놓은 로프 덕분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고 한다.
박 대장은 “엉엉 운 게 30분 이상은 됐을 것”이라며 “울다가 움직이려는데 공포 때문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고 털어놓았다.
1995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눈사태로 파묻혔다가 살아났고, 1997년 다울라기리에서는 빙하가 갈라진 틈에 빠지기도 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박 대장은 지옥이 있다면 북극일 것이라고 치를 떨었다.
매우 춥고 배가 고프며 바닷물에 빠지면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치면서 미이라처럼 굳어버린다고 했다.
박 대장은 “북극점에 두 번째 도전할 때 가장 고민했던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하면 다시 와야 하는 것이었다”며 “그래서 극점에 밟는 순간에 다시는 안 와도 된다는 안도감에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2월 한 차례 북극점 도달에 실패했다가 2005년 5월 두 번째 도전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가장 큰 영예는 8,000m 신루트” = 박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완등 과정에서 한 차례 오른 안나푸르나를 다른 방식으로 오르려다 실종되고 말았다.
이번 등반은 정상에 오르는 결과를 중시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에서 벗어나 험한 길을 골라 산을 오르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지향하는 방식이었다.
박 대장은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루트로 오르는 데 성공해 ‘코리안 루트’를 개척했다.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은 또 다른 ‘코리안 루트’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영도 전 대한산악연맹 회장이자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의 미수(米壽) 기념문집에 최근 기고한 글에서 소신을 털어놓았다.
”네팔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했다. 지금 나는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등반대가 한창 벽에 붙어 있을 때 김영도 대선배님은 88세 생신을 맞게 될 것이다.”
박 대장은 기고문에서 “산악인에게 히말라야 8,000m 신루트라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랜드슬램을 이뤘는데 또 도전하는가’라고 질문하지만 나는 대표적인 것들만 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박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3극점 같은 곳 외에도 자연과 상대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탐험가에게 정년은 없고 나는 내 나이에 맞는 탐험과 등반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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