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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고락 함께하고 전사한 황하삼… 이름 석 자 가슴 깊이 새겨”

“생사고락 함께하고 전사한 황하삼… 이름 석 자 가슴 깊이 새겨”

입력 2018-04-25 17:12
업데이트 2018-04-2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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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0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4명의 동창생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4명의 동창생 나라를 지키려고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3반 4명의 동창생. 왼쪽 원 안부터 문병하(해병 6기), 한경희(해병 6기), 윤중기, 임석주(해병 6기). 1950년 5월 10일 촬영.
윤중기 인터뷰

일시 1997년 11월 6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윤중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0년 12월 18일 황하삼과 인천을 출발

6·25 사변 때 나는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이었으며 살던 곳은 동구 인천극장 건너편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할 때는 앞집에 살던 황하삼(黃夏三·인천해성중학교 3학년)과 함께 출발했다.

함박눈이 많이 내린 그 날 깊은 밤에 도착한 곳이 안양이었고 안양에서 새벽 쪽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걸어서 도착한 곳이 수원이었다.

수원에서부터 터벅터벅 걸어서 남하하여 대구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그날이 1950년 12월 24일 성탄절 전날이었다. 대구에서 삼랑진을 거쳐 다음 집결지인 마산까지 가게 되었다.

1951년 1월 3일 황하삼과 내가 17일 동안 걸어서 내려와 마산에 도착해 보니 마침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이 있어서 중학교 4~6학년들이 신병모집에 응했는데 나는 황하삼이 어려서, 황하삼과 같이 움직이려고 해병 신병 모집에 지원하지 않았다.

이때 나와 인천공업중학교 같은 반이었던 문병하, 한경희, 임석주를 포함한 4~6학년 중학생 600여명이 해병 6기로 입대하였다.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황하삼과 함께 입대

해병 6기 신병모집에 나이가 어려서 지원도 못 한 중학교 1~3학년 학생들과 탈락한 중학교 4~6학년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1500여명은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부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3주 훈련을 마치고 군인이 된 우리들은 부산 동래온천에 있었던 육군보충대로 갔다.
5사단 35연대 1대대 보급과 탄약소대 복무 시절의 윤중기(앞줄). 1951년 9월 18일 촬영.
5사단 35연대 1대대 보급과 탄약소대 복무 시절의 윤중기(앞줄). 1951년 9월 18일 촬영.
5사단 35연대 1대대에 황하삼과 함께 배속

육군보충대에서 드디어 트럭을 타고 하루 종일 걸려 강원도 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최전방이 가까워져 오면서는 포성 소리가 은은히 들리더니 점차 그 소리는 커지고 화약 냄새도 났다.

그렇게 화약 냄새가 나는 골짜기를 지나 도착한 곳이 5사단 사령부였다. 여기에서 각 연대로 배치되고 나와 황하삼은 함께 35연대 1대대로 배치받았다.

1대대 보급과 탄약소대에 황하삼과 함께 배치

나와 황 하삼은 5사단 35연대 제1대대 보급과에 있는 탄약소대에 남게 되었다. 당시 내가 배치받았던 탄약소대는 1대대 전 지역에 탄약을 보급하는 곳이었다.

5사단 35연대 1대대 CP에서 출발하여 나는 황하삼과 탄약 실은 트럭 위에 앉아 전방 대대 OP 쪽으로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했다.

보급물자를 실은 트럭을 타고 대대CP를 출발하여 트럭 위에서 보니까 콘크리트 다리 옆으로 큰 바위산이 있고 그 다리를 지나서면 왼편으로 샛길이 나타나면서 그 길로 우리 탄약차가 들어서면 그곳이 바로 대대 OP가 있는 풍기국민학교였다.

대대OP·CP를 설명하자면 대대OP는 대대전방지휘소를 말하며 대대전방 전투지역 가까운 곳에 위치를 잡아 대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곳이고, 대대CP는 대대의 후방에서 행정과 보급을 맡아 전투지역을 지원해 주는 곳이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52년 6월 12일 문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수(인천영화중학교 4학년·현 대건고 1학년)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3부자. 왼쪽부터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근표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6·25 편찬위원장).
동네 친구 황하삼의 전사

인천학도의용대 화수분대에서 나하고 같이 활동한 황하삼이 살던 집은 인천극장 앞 우리 집 건너편이었다.

황하삼은 인천에서 남하할 때부터 나하고 같이 걸어서 내려갔고,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도 같이 입소했고, 부산 동래 임시보충대에서 같이 지냈고, 5사단 35연대 1대대 보급과 탄약소대에도 같이 배치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 유일한 친구이며 전우였다.

황하삼은 나와 같이 최전방에 있을 때 적 포탄이 떨어지면서 파편에 뒤통수를 맞아 내가 보는 앞에서 즉사하였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던 첫 휴가

1951년 6월 중순에 대대장이 나에게 첫 휴가를 가라고 배려해 준 것은 인천부터 나하고 같이 전쟁터에 온 내 친구 황하삼이 며칠 전에 전사했기 때문에 대대장이 나를 위로해 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고향 인천의 내 집을 떠났을 때는 1950년 12월 18일, 그때로부터 불과 7개월 만이었지만 몇 년 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막 집에 가까이 갈수록 부모님과 형제들 보고 싶었던 감정은 사라지고 갑자기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황하삼 얘기를 어떻게 꺼내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황하삼(인천해성중 3학년 때 입대·15세 전사)
황하삼(인천해성중 3학년 때 입대·15세 전사) 1935년 11월 25일 : 인천 화수동 출생.
1950년 12월 18일 : 윤중기와 같이 남하 시작.
1951년 1월 10일 : 부산에서 자원입대.
1951년 6월 4일 : 인제지구 전투에서 전사.
1998년 2월 28일 이규원 치과 원장 촬영
황하삼 어머니 통곡의 눈물

어느덧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과 반가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좀 있으려니까 황하삼 어머니께서 오시더니 “우리 하삼이도 잘 있지?”라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 어머니, 하삼이는 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귀대 날짜는 다가오고 해서 할 수 없이 황하삼이 전사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그러자 황하삼 어머니는 “왜 내 아들만 죽었냐”라고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고, 황하삼 식구들은 온통 울음바다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52년 7월 5일 상이용사로 제대

나는 가칠봉 전투에서 괴뢰군의 집중 포격으로 전신에 파편상을 당해 부산 1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8개월 동안 내 몸 안에 박혀있는 파편을 빼내는 긴 입원 치료를 받은 후 1952년 7월 5일 상이용사로 명예제대를 하였다.

한 형제같이 함께 자란 황하삼!

조국과 고향을 지키려 전쟁터까지 같이 가서, 나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는 죽어서 고향에 오지 못하고, 그래도 항상 네 이름 석 자 황하삼은 내 가슴 속 깊이 있다.

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11회 계속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참전기 10회를 마치며

같이 한 동네서 자란 중학생 황하삼과 윤중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같이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한 후 한 부대에서 같이 참전하였습니다.

먼 훗날에도, 나라를 위하여 전사한 인천학생 황하삼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기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합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1997년 11월 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친 윤중기 옹.
1997년 11월 6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친 윤중기 옹.
윤중기

▲공립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 ▲인천학도의용대 화수분대 소속

1950년 12월 18일 :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생으로 동네 친구 황하삼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도보로 남하 시작함.

1951년 1월 10일 :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도착하여, 동네 친구 황하삼과 같이 자원입대함.

1951년 6월 4일 :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윤중기 옆에 있었던 황하삼이 전사함.

1952년 7월 5일 : 상이용사로 명예제대.
2018-04-26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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