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상봉단 고령자 채훈식·리홍종·정규현 할아버지남측 상봉단 고령자 김남규 할아버지·권오희 할머니
전쟁 난리통에 남편과 연락이 끊긴 이옥연(88) 할머니는 행여나 남편이 못 찾을까봐 이사도 하지 않고 남편이 손수 만든 신혼집에서 홀로 억척스럽게 아들을 키웠다.그렇게 남편을 기다린 지 65년 만인 20일 이 할머니는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사랑하는 남편 채훈식(88) 할아버지를 만난다.
남편을 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몇 년 전 남편의 먼 친척인 최문식 전 국회의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편과 만나 서로 생사를 확인한 뒤 더욱 간절해졌다.
아들인 희양 씨는 “당시 아버님께 ‘(남측의) 가족들 잘 있다’고 전하니 깜짝 놀라시더라는 소식을 들었다”며 “그 이후 우리가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아버님의) 연락을 계속 기다렸다”고 말했다.
생사 확인 전에도 아버지의 제사는 따로 지내지 않고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다고 희양 씨는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에 아버지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으로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할머니를 모시고 이날 상봉 행사장인 금강산에 도착한 손자 정재 씨는 “할머니가 상봉 대상자 소식을 듣고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고 하시더라”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잘 생겼었다’ ‘방 안에 있으면 빛이 났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 할머니 가족은 희양 씨가 직접 농사짓고 수확한 햅쌀을 비롯해 내복, 양말, 장갑을 할아버지 선물로 준비했다.
연합뉴스1차 상봉 행사에는 채훈식 할아버지와 함께 북측 방문단의 최고령자인 리홍종(88), 정규현(88) 할아버지도 참석한다.
리홍종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10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리 할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이번에 리 할아버지가 상봉을 신청하면서 갑자기 생존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다만 안타깝게도 리 할아버지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35년 전에 세상을 달리했다.
리 할아버지의 조카인 이인경 씨는 “사촌 누나(리홍종 할아버지 딸)가 상봉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된다며 나보고 확인해달라고 하더라”라며 “누나는 그날부터 오늘까지 계속 눈물로 지새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권투연맹 회장으로도 활동 중인 인경 씨는 “작은 아버님에게 드리려고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준비했다. (금반지도) 내가 끼고 가서 끼워 드리려고 한다”며 설레 했다.
정규현 할아버지의 남측 가족들도 할아버지를 위해 양말, 내복, 화장품, 시계, 의약품, 현금을 준비했다.
남측 방문단의 고령자 중 한 명인 권오희(92.가족들은 97세라고 말함) 할머니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의붓아들 리한식(80) 씨의 똘똘했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공부를 곧잘 하던 아들은 당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안동중학교 교사에 지원했다.
합격 발표날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급하게 집으로 오던 아들은 귀갓길에 북으로 끌려갔고 지금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권 할머니의 아들인 이만인 씨는 “형님이 끌려가고 나서 10일 뒤 집으로 합격 통지서가 와서 아버지가 많이 우셨다고 들었다”며 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다.
권 할머니와 함께 남측 방문단에서 최고 고령자에 속하는 김남규(96) 할아버지도 전쟁 전 면사무소 직원으로 활동하던 당찬 막내 여동생을 만날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귀가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지금 아니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동생을 만나러 가기 위해 김 할아버지는 전날 이산가족 집결 장소인 속초 한화리조트에서 혈압과 맥박 등 건강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김 할아버지를 찾아 인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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