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모(42)씨. 우린 그의 이름 석 자마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얼마 전 서울 관악구에서 여섯 살 아들과 함께 굶어죽은 지 두 달 만에 발견됐다는 북한 이탈 여성이다. 영국 BBC가 23일 보도하기 전까지 기자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기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무관심했고 모자가 쓸쓸히 죽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해서 BBC가 소개한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조차 염치 없어졌다.
한씨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의 채소 노점상은 한씨에게 화가 잔뜩 났다. 계속 상추를 만지작거리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500원뿐이라 상추 몇 장 밖에 살 수 없어 그랬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였다.
두 달 이상 흐른 뒤 모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수도 검침원이 찾아왔다가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 관리인과 함께 문을 열어본 차였다. 집안에 먹을 거라곤 고춧가루 뿐이었다. 한씨가 지난 봄, 마지막으로 은행을 들렀을 때 잔고는 3858원이었다. 앞의 노점상은 “그 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처음에 난 그녀가 까탈스럽워 밉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심했다. 그녀가 만약에 내게 잘 얘기했더라면 난 상추 몇 장을 얹어줬을 것이다.”
BBC 기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만난 많은 이들이 “만약에“란 말을 공통적으로 했다고 했다. 만약에 당국이 그녀의 어려움을 일찍 파악했더라면, 만약에 정부가 북한 이탈민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줬더라면, 만약에 그녀가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등등 말이다.
그녀는 1000만명이 모여 살고,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 배불리 먹고 싶어 북한을 떠난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보이지 않는 인간처럼 살았다. 말수가 적었고, 늘 모자를 써 얼굴을 가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다녔다.
생전의 한씨와 얘기를 나눠본 두 북한 이탈 주민은 그녀가 탈출 과정에 중국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방송은 이를 따로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한씨는 10년 전 홀로 서울에 도착했다. 하나원에서 12주 동안 남한사회 적응 교육을 받으면서도 중국 남편에 대해 함구했다. 당시에는 하나원 입소자가 300명 이상으로 최대 규모였다. 그들 모두 중국을 통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웃고 밝은 이면에는 늘 어두움이 있게 마련이었다. ‘뭔가 잘못됐지’라고 물으면 그녀는 딱 잘라 아니라고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남한에 정착했던 초기에는 잘 지냈다. 당국은 임대 아파트를 제공했고 그녀는 여섯 동료와 함께 관악구에 기틀을 잡았다. 한 동료는 “예쁘고 여성스러웠다. 우리 학급에서 나 다음 두 번째로 직업을 구했다. 서울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좋은 평판을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여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하며 충분히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너무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두 북한이탈 주민은 중국인 남편을 설득해 서울에 오게 한 다음 경남 통영에서 선원으로 일하게 됐다고 알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이 그 때 태어났는데 학습장애를 안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남편은 큰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홀로 남겨진 한씨는 직업도 없이 장애 아들만 짐처럼 남겨졌다. 이웃들은 그녀가 큰아들을 사무치게 보고 싶어했다고 입을 모았다.
관악구로 돌아와 지난해 10월 자치센터 등에 도움을 청해 매월 육아수당으로 10만원씩 받았다. 모자는 복지 시스템의 함정에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부모가 있는 가정보다 6~7배 정도 많은 수당을 챙길 수 있었으나 이혼 증명서가 없는 그녀로선 이를 요구할 수가 없었다.
자치센터 직원들이 지난 4월 연례 점검 차 방문했을 때 한씨는 집에 없었다. 직원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였다. 임대료는 물론 각종 납부 독촉서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북한 이탈 주민에게 주어지는 보조금 지급 기한(5년)도 지나 있었다.
광화문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 주변에는 정부와 당국의 무관심을 질타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 사람은 “굶주림을 피해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 남쪽에서 굶어죽은 이 아이러니를 어찌해야 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하나원 동료는 친구가 이런 식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쟁점화하거나 누구 잘못인지 손가락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내 마음을 정말로 할퀴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일을 활용하려 하는지”라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얼마 전 서울 관악구에서 여섯 살 아들과 함께 굶어죽은 지 두 달 만에 발견됐다는 북한 이탈 여성이다. 영국 BBC가 23일 보도하기 전까지 기자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기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무관심했고 모자가 쓸쓸히 죽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해서 BBC가 소개한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조차 염치 없어졌다.
한씨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의 채소 노점상은 한씨에게 화가 잔뜩 났다. 계속 상추를 만지작거리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500원뿐이라 상추 몇 장 밖에 살 수 없어 그랬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였다.
두 달 이상 흐른 뒤 모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수도 검침원이 찾아왔다가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 관리인과 함께 문을 열어본 차였다. 집안에 먹을 거라곤 고춧가루 뿐이었다. 한씨가 지난 봄, 마지막으로 은행을 들렀을 때 잔고는 3858원이었다. 앞의 노점상은 “그 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처음에 난 그녀가 까탈스럽워 밉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심했다. 그녀가 만약에 내게 잘 얘기했더라면 난 상추 몇 장을 얹어줬을 것이다.”
BBC 기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만난 많은 이들이 “만약에“란 말을 공통적으로 했다고 했다. 만약에 당국이 그녀의 어려움을 일찍 파악했더라면, 만약에 정부가 북한 이탈민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줬더라면, 만약에 그녀가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등등 말이다.
생전의 한씨와 얘기를 나눠본 두 북한 이탈 주민은 그녀가 탈출 과정에 중국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방송은 이를 따로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한씨는 10년 전 홀로 서울에 도착했다. 하나원에서 12주 동안 남한사회 적응 교육을 받으면서도 중국 남편에 대해 함구했다. 당시에는 하나원 입소자가 300명 이상으로 최대 규모였다. 그들 모두 중국을 통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웃고 밝은 이면에는 늘 어두움이 있게 마련이었다. ‘뭔가 잘못됐지’라고 물으면 그녀는 딱 잘라 아니라고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남한에 정착했던 초기에는 잘 지냈다. 당국은 임대 아파트를 제공했고 그녀는 여섯 동료와 함께 관악구에 기틀을 잡았다. 한 동료는 “예쁘고 여성스러웠다. 우리 학급에서 나 다음 두 번째로 직업을 구했다. 서울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좋은 평판을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여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하며 충분히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너무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두 북한이탈 주민은 중국인 남편을 설득해 서울에 오게 한 다음 경남 통영에서 선원으로 일하게 됐다고 알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이 그 때 태어났는데 학습장애를 안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남편은 큰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홀로 남겨진 한씨는 직업도 없이 장애 아들만 짐처럼 남겨졌다. 이웃들은 그녀가 큰아들을 사무치게 보고 싶어했다고 입을 모았다.
관악구로 돌아와 지난해 10월 자치센터 등에 도움을 청해 매월 육아수당으로 10만원씩 받았다. 모자는 복지 시스템의 함정에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부모가 있는 가정보다 6~7배 정도 많은 수당을 챙길 수 있었으나 이혼 증명서가 없는 그녀로선 이를 요구할 수가 없었다.
자치센터 직원들이 지난 4월 연례 점검 차 방문했을 때 한씨는 집에 없었다. 직원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였다. 임대료는 물론 각종 납부 독촉서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북한 이탈 주민에게 주어지는 보조금 지급 기한(5년)도 지나 있었다.
BBC 홈페이지 캡처
하나원 동료는 친구가 이런 식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쟁점화하거나 누구 잘못인지 손가락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내 마음을 정말로 할퀴는 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일을 활용하려 하는지”라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