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경영체제로 떼돈 번 기업소, 노동자에 거액 월급 일부에 제한된 현상…”부패·부익부 빈익빈 심화 우려”
“얼마 전 무산광산에 파견된 함경북도 당위원회 김철수(가명) 부부장은 제2 선광장 노동자 한명길(가명)한테 중국산 자전거 한 대를 뇌물로 받았다.김철수는 뇌물로 받은 자전거를 시장에 내다 팔면 북한돈 40∼50만원을 받을 수 있어 이 돈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보낼 생각이다.
반면 노동당의 말단 기층조직 책임자인 세포비서를 겸하는 한명길은 공장에서 월급과 함께 받은 자전거를 도당의 ‘높으신 간부’에게 줬기 때문에 선광장 초급당비서로 승진할 꿈을 꾸고 있다.
한명길은 요즘 공장에서 받는 평균 월급이 40만원이나 돼 자전거를 김철수에게 뇌물로 줘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
김철수는 한명길보다 사회적 지위가 월등하지만, 생활비(월급)는 고작 4천여원으로 한명길 평균 월급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북중 접경지역에 사는 북한 주민들은 최근 이런 소식을 남한의 탈북자 사회에 자주 전해온다.
노동자가 당 간부보다 더 ‘부자’인,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현상이 북한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일부 대기업 생산라인의 직원 월급이 중앙부처 일반 공무원보다 많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방불케 한다.
이런 변화는 김정은 체제가 야심하게 추진하는 기업의 독자경영체제 도입 ‘덕’이라는 게 북한 주민들의 일치한 전언이다.
북한은 지난해 경제 사령탑인 내각 총리에 박봉주를 다시 앉히고 ‘새로운 경제관리개선 조치’라는 이름 아래 전역의 생산현장에서 외형만 국영기업일 뿐 자본주의 기업이나 다름없는 독자경영체제를 도입해 경제성장을 꾀하고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올해 4월 독자경영체제에 대해 “국가계획을 벗어난 생산을 자체 결심으로 조직하고 판매하며 종업원들의 보수, 복리후생 등도 자체 실정에 맞게 실시하도록 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자재 수입과 생산, 판매, 노동자 급여 지급과 복지 등 모든 경영권을 공장에 부여했다는 것이다.
독자경영체제 도입 이후 철광석을 중국 기업에 수출하는 무산광산처럼 돈을 많이 버는 기업소의 노동자들은 매월 수십만 원씩 월급을 받아간다고 한다.
복수의 대북소식통은 “무산광산뿐 아니라 동광석을 중국에 수출하는 혜산광산 노동자들도 평균 북한돈 30∼40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라며 “야근이 많고 생산실적이 높은 광부들은 최고 80만원까지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북한 돈 80만원이면 1㎏당 5천∼6천원씩 하는 쌀을 130∼160㎏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렇다고 모든 생산현장의 노동자가 수십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 있는 공장의 노동자와 생산실적인 낮은 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100배에서 최고 200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지방의 대규모 기업소에서 수천∼수만 명의 노동자에게 고액 월급을 주다 보니 북한 돈이 바닥나 월급 일부를 물건으로 대체해 지급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 대북소식통은 “무산광산 노동자들은 작년 6월께부터 고액 월급을 받기 시작했지만 어떤 달에는 월급을 못 타거나 월급의 60∼70% 이상을 시장가격으로 환산한 식용유, 설탕가루, 겨울 솜옷, 자전거 등 물건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모두 독자경영체제 도입에 따른 일종의 ‘후유증’인 셈이다.
독자경영체제의 시행으로 돈 잘 버는 공장 노동자들의 윤택한 생활수준은 북한 매체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7일 3면에 대표적 비료생산공장인 평안남도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의 노동자 후생복지와 관련한 사진을 게재했다.
수십 마리의 소떼와 수백 마리의 오리, 냉동창고에 꽉 들어찬 육류, 비닐하우스 안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토마토, 음식이 풍성한 식당, 심지어 화려한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겼다.
예전 같으면 큰 공장이라도 기껏해야 조그마한 돼지목장을 가진 것이 전부였고 소목장이나 채소 재배용 비닐하우스, 특히 수영장 같은 후생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천지개벽인 셈이다.
조봉현 IBK 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비료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상 가족단위영농제라고 할 수 있는 포전담당책임제가 지난해부터 본격 도입된 것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종전에는 비료공장이 ‘국가계획’에 따라 농장에 정해진 양의 비료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면 포전담당제 도입 이후에는 생산의욕이 높아진 농장들에서 저마다 시장 가격으로 비료를 사가면서 비료공장의 이익 창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경영체제의 도입 이후 노동자 복지 수준이 최고로 꼽히는 곳은 평양기초식품공장이다.
된장, 간장, 식용유 등 기초식품을 생산해 평양시민에게 공짜와 다름없는 싼 가격으로 공급하던 이 공장은 독자경영체제 도입 이후 생산물을 시장가격으로 판매하면서 ‘부자 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노동신문은 올해 6월 이 공장이 최상 수준의 탁아소와 현대적인 도서실, 희한한 수영장과 체육관, 음악감상실 등을 갖췄다며 “휴양소같이 꾸려진 공장”이라고 소개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북한 경제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는 것은 이미 저변에 자리 잡은 시장의 힘과 더불어 자본주의식 독자경영체제의 과감한 도입 때문으로 보인다”며 “이런 것이 증산과 주민의 수입 확대를 가져오고 나아가 내수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독자경영체제의 확대는 경제 성장기의 다른 국가들처럼 부패가 만연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는 등의 사회문제를 낳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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