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권고→선관위 의뢰→철회 이틀새 급선회
도종환 민주통합당 의원의 작품에 대한 ‘교과서 삭제’ 논란을 둘러싸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보여준 ‘갈지(之)자 행보’를 놓고 비판이 일고 있다.평가원은 내년에 발행될 예정인 중학교 국어 검정교과서 18종을 지난달 심사해 16종에 대해 합격을 결정했다. 이 가운데 도 의원의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 8종에 대해서는 출판사에 수정ㆍ보완을 권고해 사실상 삭제를 요구했다.
삭제의 명분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였다. 이를 위해 현역 정치인을 포함, 현존 인물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는 게 검정 심사의 원칙이라는 게 평가원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도 의원의 작품들은 지난 10년 간 교과서에 실려 사회적으로 검증이 됐고, 정계 입문 이전에 쓴 작품을 뒤늦게 문제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평가원은 9일 논란이 불거지자 보도자료를 내고 “현역 정치인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는 것이 심사의 원칙”이라며 “이번 사안이 정치적 논란의 여지로 확대 해석되는 것에 심각히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오히려 평가원의 권고가 ‘정치적 결정’이며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논란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새누리당은 논평에서 “작가의 신분 변화를 이유로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중립을 벗어난 처사”라고 말했고, 민주통합당도 논평에서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교육 내용을 지켜내야 할 평가원이 오히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꼴”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평가원은 9일 오후 두번째 보도자료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심의회를 재개최해 처리 방안을 심의할 계획”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10일에는 심의회를 재소집해 수정ㆍ보완 권고를 철회, 이틀 만에 급선회했다.
평가원의 일처리 방식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평가원이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하자 정치적 부담을 덜려는 제스처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침을 철회할 명분을 찾기가 어렵자 선관위를 지렛대로 삼아 발을 빼려 한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선거 및 정당사무 관리 등이 주된 업무이지만 정치ㆍ선거 관계법령의 해석과 의견 개진도 한다. 따라서 유권해석 의뢰는 가능하지만 선거운동 기간도 아닌데다 평가원이 판단하면 될 고유 업무에 선관위를 끌어들인 것은 옹색해 보인다는 지적이 많았다.
형평성 논란도 불거졌다.
과거 민정당 의원을 지냈던 김춘수 시인의 ‘꽃’은 교과서에서 한 번도 삭제된 적이 없는데 왜 도 의원의 작품은 빼느냐는 지적이었다. 평가원은 “국어 교과서는 2007년 개정 교육과정 이후부터 검정 심사 대상이 됐다”고 비켜갔다.
그러나 작품의 문학성은 도외시한 채 단지 작가가 현역 정치인이냐 아니냐를 잣대로 기계적 판단을 내린 것은 편협한 처사라는 반박이 이어졌다.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사한 논란은 언제든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경우 초중고 교과서 11권에 등장하며 ‘진로와 직업’ 등의 부문에서 긍정적으로 서술돼 있다.
현역 정치인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산문을 교과서에서 빼야 하는지, 박근혜 캠프에 합류한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지난해 집필한 고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는 어떻게 볼지 등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정치인 지지를 표명한 문인의 작품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선 예비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던 안도현 시인은 “도종환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면 저의 작품들도 모조리 빼 주시기 바란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다.
결국 평가원이 삭제 권고를 없던 일로 하면서 ‘결자해지’했지만 형식 논리에 치우쳐 사회적 혼란과 소모적 논쟁을 자초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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